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작가 Nov 07. 2018

더러운 인간에 대한 탐구

바타이유, <에로티즘> 

"사회와 자연의 모든 삶이 왕의 신성한 인격 속에 집약적으로 상징화되는 경우 왕의 죽음은 위기를 야기시키고 의례적 방종을 조장하는 순간이 온다. 왕의 죽음은 갑작스럽게 덮친 천재지변과 아주 똑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이제 사회적 차원의 모독 행위가 행해진다. 모독 행위는 위엄, 계급, 권력 등을 파고든다. 민중의 폭력과 광란은 전혀 제지를 받지 않는다. 오히려 민중은 생전에 고인의 뜻을 따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듯이 광란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샌드위치 섬의 군중들은 왕이 서거하자 평상시에는 죄악시하던 모든 일들을 자행했다. 그들은 방화하고 약탈하고 살해를 서슴지 않았으며 여자들은 공공연한 매음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피지 섬은 더 뚜렷한 예를 보여 준다. 추장의 죽음은 곧 약탈 신호와도 같은 것이었다. 추장이 죽자 조공을 바치던 부족들은 수도를 점령하여 갖은 강도짓과 약탈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위반들은 모독에 그치지 않으며 어제 생겨나서 내일 가장 성스럽고 가장 범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 있는 규칙조차 침해한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가장 엄청난 신성 모독으로 드러난다."

    "더러움과 부패가 최고조에 이르는 죽음이라는 시점에 이르면", "세상이 더럽고 역겨운 죽음으로 가득 차서 참을 수 없는 때가 되면" 무질서가 발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무질서는 "임금의 시신 중에 썩을 만한 것이 다 썩고 더 이상 썩지 않는 단단하고 신성한 뼈를 보일 때에야 비로소 극성스러움을 멈추기에 이른다"

    위반의 메커니즘은 이처럼 폭력이 폭발하면서 시작된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금기의 위반에 저항하고 싶어 했으며 또 저항한다고 믿었다. 인간은 폭력 충동을 자기 안에 가두면서 그것을 현실에서도 가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폭력을 가로막기 위해 사용한 방어벽이 더 이상 효과가 없어지면 인간이 지키던 금기들도 덩달아 의미를 상실하기에 이른다. 지금까지는 잘 다스려져 왔던 폭력 충동이 폭발하면서, 이제 인간은 마음대로 살해를 저지르기에 이르며, 성적 과잉을 조절하지 못하는 인간은 지금까지 조심스럽게 하던 짓을 이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절제 없이 공개적으로 해 댄다. 왕의 시신이 창궐하는 부패의 영역에 머무는 한, 사회 전체는 폭력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한다. 왕의 생명을 죽음의 힘으로부터 보호하던 방어벽이 무너지자 무절제를 적절히 통제하면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던 규칙들도 힘을 잃고 한꺼번에 와르를 무너지기에 이른 것이다. 

    왕의 죽음이 초래하는 이 '엄청난 모독 행위들'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죽은 왕의 시신이 육탈 되고서야 비로소 형태도 없이 분출하던 무절제의 시간은 막을 내린다. 따라서 이렇게 불리한 경우에 있어서조차도 인간의 위반은 동물적 삶의 일차적 자유왇는 다르다. 인간의 위반은 일상적으로 지켜지던 금칙에 한번 도전할 뿐, 한계를 유보해 둔다. 인간의 위반은 위반의 보완물인 세속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은 채 그것을 넘어서는 행위이다. 인간 사회가 오직 노동의 세계인 것만은 아니다. 세속의 세계와 신성의 세계는 동시에 위반을 구성하며, 둘은 위반의 두 가지 보완적 형태들이다. 세속의 세계는 금기의 세계이다. 신성의 세계는 제한된 위반으로 열린 세계이다. 그것은 축제의 세계이고 군주들의 세계이고 신들의 세계이다. 


-<에로티즘> 조르쥬 바타이유




난 철학이 좀 더 생물학에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동물로서의 인간을 너무나 모르기 때문이다. 바타이유는 동물로서 인간, 더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인간의 모습을 예민하게 관찰하는 데, 이를 통해서 비로소 순수한 인간의 모습을 구상화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3개월 전쯤에 위의 부분을 읽으면서 지도자에 대한 우리의 분노는 어디서 기원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임금이 죽으면 죽었을 때는 아무 소리 못하다가, 죽고 나서 육탈 하는 원시부족인들의 심리적 기제와 오늘날 지도자에 대한 뒷담화, 상사에 대한 뒷담화가 이 육탈과 비슷한 심리적 기제로 작동한다고 느껴진다. 


김대중에 대한 분노, 노무현에 대한 분노, 이명박에 대한 분, 박근혜에 대한 분노, 좌파건 우파건 이 모든 분노에는 육탈하고자 하는 원시부족의 심리가 여전히 우리에게도 남아 있는 것이다. 원시인들은 임금, 지도자의 통제를 받으며 꿋꿋이 버텼을 것이다. 그것이 사회를 유지하고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권력을 잃고, 죽어버리자 그를 따랐던 부족민은 자신의 비겁함, 나약함, 소심함을 갈기갈기 찢고 싶었을 것이리라. 그래서 누구보다 앞장서서 선동한다. 저 자를 죽여라!!! 왕의 시신이 모두 훼손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에게 복종했던, 나약한 자신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타율적으로 복종한 자신의 신체에 대한 분노가 왕의 신체에 대한 훼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역설적으로 정화의 과정인데, 이를 통해 인간은 새로운 신화, 신성의 세계, 금기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타이유는 이렇게 더러운 인간을 끝까지 추적한다. 그래서 철학은 문명의 고상함에서 그 끝없는 인간의 더러움을 발견하는 작업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모든 사람의 삶은 제각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