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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몸국, 바다의 풀이 돼지뼈를 만났을 때

생존과 나눔의 인문학

by 애들 빙자 여행러

제주를 상징하는 음식은 무엇일까요? 흑돼지, 갈치, 해산물? 그것들은 제주의 맛있는 얼굴일 뿐, 진짜 제주의 정체성은 바로 한 그릇의 국물 속에 담겨 있습니다. 바로 ‘몸국’입니다.


몸국은 단순한 해장국이 아닙니다.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지혜와,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던 따뜻한 공동체의 마음이 녹아있는 제주의 영혼 그 자체입니다. 잔칫집의 귀한 국물이었던 몸국이, 어떻게 섬 전체의 일상식이 되었을까? 특히나, 몸국과 '접짝뼈국'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일지. 차가운 바람이 부는 계절에 맛을 찾아 떠나 봅니다.


하나의 뿌리, 두 개의 운명: '몸국'과 '접짝뼈국'의 갈림길


첫 번째 놀라운 진실은 몸국에겐 운명이 갈린 형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접짝뼈국'입니다. 이 두 음식은 돼지를 잡는 잔치에서 나온 '돗국물(돼지 육수)'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되었지만, 전혀 다른 음식으로 발전했습니다.


두 음식 모두 돼지 한 마리를 잡아 모든 부위를 알뜰하게 활용하려던 제주의 '조냥정신(절약 정신)'에서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돗국물에 무엇을 넣었느냐에 따라 그 운명이 갈렸습니다. 몸국이 바다의 해초 '모자반'을 선택해 '바다와 육지의 조화'와 '해장'을 상징하게 되었다면, 접짝뼈국은 귀한 '돼지 등뼈'를 넣어 '노동력'과 '보양'을 책임지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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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국이 ‘육수와 바다의 재료를 섞어 모두에게 나누어 먹이려던 지혜’를 담고 있다면, 접짝뼈국은 ‘가장 진하고 귀한 고기 부위와 육수를 이용해 노동의 에너지를 보충하려던 힘’을 담고 있습니다. 결국 이 두 음식은 제주라는 환경에서 탄생한 돼지 육수 활용의 '투 트랙(Two Track) 생존 전략'이 낳은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돼지고기와 해초의 상상 초월 조합: 척박한 땅 생존 과학


두 번째 진실은 기름진 돼지 육수와 바다 해초 '모자반'이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재료의 조합이 사실은 매우 과학적인 '생존의 지혜'였다는 점입니다. 왜 제주 사람들은 이 극단적인 두 재료를 섞었을까요?

스크린샷 2025-11-26 오후 8.06.58.png <출처 : 위키백과>

그 답은 효율성과 균형에 있습니다. 돼지고기의 기름진 느끼함을 모자반에 풍부한 섬유질과 후코이단 성분이 완벽하게 잡아줍니다. 이는 단순히 맛을 개운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 소화를 돕고 영양의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합니다. 덕분에 몸국은 느끼하지 않고 구수하면서도 개운한, 제주 사람들이 '베지근하다'고 표현하는 독특한 맛을 냅니다.


이 조합은 척박한 제주 땅에서 육지의 자원(돼지)과 바다의 자원(모자반)을 극한까지 활용하려던 제주인의 '조냥정신'이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이었습니다. 몸국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이 아닙니다. 제주라는 한정된 환경에서, 육지와 바다의 모든 자원을 극한까지 끌어다 쓴 '생존의 지혜'입니다.


잔칫집 특별식에서 국민 해장국으로 진화


마지막으로, 몸국이 잔칫집에서만 맛볼 수 있던 특별식에서 오늘날 제주를 대표하는 일상식으로 진화하기까지 세 번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1단계: 공동체 문화의 시스템화 (조선 후기~)


과거 제주에서는 혼례와 같은 큰 잔치가 열리면 돼지를 잡아 온 마을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이때 돼지를 삶아낸 거대한 가마솥의 '돗국물'에 모자반을 넣어 끓인 몸국은, 많은 사람이 함께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이었습니다. 바로 이 대량 조리 과정에서 놀라운 과학적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모자반의 끈적한 알긴산 성분과 돗국물의 콜라겐이 만나 국물에 특유의 '배지근한' 질감과 농후한 감칠맛을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이 시기 몸국은 '나눔과 공동체'의 상징이었습니다.


2단계: 식량난과 확장의 기술 (한국 전쟁 직후)


한국 전쟁 이후 식량이 부족했던 시절, 몸국은 중요한 '구호 식량'의 역할을 했습니다. 잔칫집에서 남은 국물은 하룻밤 식혔다가 다음 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메밀가루를 풀어 온 마을 사람들을 먹였습니다. 귀한 돗국물에 메밀가루를 넣으면 국물의 양이 늘어나고 걸쭉해져 적은 양으로도 큰 포만감을 주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조리법을 넘어, 귀한 음식을 한 명이라도 더 나누기 위한 '확장(Extension)의 기술'이었습니다.


3단계: 도시화와 상업화 (1990년대 이후)


1990년대 이후 고기국수가 제주의 향토 음식으로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같은 돗국물을 사용하는 몸국이 고기국수집의 '서브 메뉴'로 함께 부활하며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만약 이 과정이 없었다면 몸국은 옛 잔칫집의 추억 속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상업화는 몸국을 제주를 대표하는 '정체성 한 그릇'으로 세상에 알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 그릇에 담긴 제주의 시간


몸국은 '버릴 것이 없다'는 제주의 철학, '조냥정신'의 완벽한 결정체입니다. 돼지 한 마리의 마지막 육수 한 방울, 바닷가에 흔했던 해초 한 가닥까지 무엇 하나 허투루 쓰지 않고 최고의 음식을 만들어낸 제주 사람들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몸국 한 그릇에는 돼지 한 마리의 생명과, 모자반을 채취하던 해녀들의 삶,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함께 나누던 수백 년의 시간이 녹아있습니다. 다음에 제주에서 몸국을 마주한다면, 그 속의 '나눔'과 '생존'의 이야기를 떠올려보세요. 그것이 당신의 제주 여행을 훨씬 더 깊고 의미 있는 경험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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