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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유배일지] 가구 판매가 아닌 가구 진열

106일차

by 태희킷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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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4.


서귀포쪽에 가구집에서 알바가 떴다. 매년 이 시기는 알바에 굶주린 젊은이들이 많이 풀릴 시기이기에 지원해놓고 잊고 있었는데 아침 일찍 연락이 왔다. 원래 일정은 어제부터 3일간 일을 하는 거였는데 혹시 4, 5일 이틀짜리도 구하시면 연락달라고 문자를 남겨놨었는데 오늘 오라고 한다. 가구 판매 알바라서 유배와서 거의 입은 기억이 없는 청바지를 꺼내입고 나간다.


알려준 주소를 지도에 찍으면 가구점이 아니라 병원이 나온다. 서귀포 시내 한복판에서 어디로 끌려갈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괜히 불안하다. 도착한 병원엔 새 간판이 달려있다. 이 곳이 병원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건 정문에 붙어있던 병원 이름 스티커를 떼어낸 자국 뿐이다. 새로 오픈을 준비하는 가구점이다. 가구 판매가 아니라 가구 진열이었다.


이렇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3일 기준으로 뽑았던 알바에 공석이 났다는 사실과 아침부터 연락이 와서 조금 늦어도 좋으니 와달라고 했던 사실을 종합해보면 이건... 어제의 누군가가 도망친 알바 자리가 분명하다.


오자마자 빨갛게 코팅된 장갑을 손에 쥐어준다. 그것도 누가 쓰던 것인지 축축한 걸 주길래 담당자가 안 볼 때 몰래 집어 던지고 바닥에 놓여있던 새 장갑을 손에 끼워 맞춘다. 깨끗한 새 가구들로 가득 찬 이 공간엔 아이러니하게도 새 것에서 나오는 먼지가 가득가득하다. 일을 시작한지 한 시간도 안됐는데 옷은 위 아래 할 것 없이 먼지를 가득 삼켰다.


일은 단순하다. 위치를 정해주면 가구를 옮기면 된다. 하지만 매장 안에 가구가 아직 다 들어오지는 않은 상태라서 어제 지하 창고에 들여놨다는 가구를 열심히 올려야 한다. 분해된 침대골조야 그리 무겁지 않은데 통으로 된 옷장이나 수납장을 옮길 땐 손가락이 휘어버릴 것 같다. 카드를 받아들고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으러 왔다. 1인당 8천원 선이라길래 똑같이 짜장으로 깔고 탕수육을 시켜먹자고 했다. 짜장은 생각보다 많이 맛이 없었고 우리는 1인당 만원을 썼다.ㄲ


반나절 일을 함께한 알바 한 분이 자연스럽게 형이라고 부른다. 스무 살 때부터 알바에 가면 자연스럽게 형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제는 진짜 그럴 나이가 된 걸 실감한다. 허리가 아픈 걸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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