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일차
2017. 1. 5.
알바 2일차. 팔근육이 적응을 끝냈는지 같은 가구를 들어도 어제만큼 힘들진 않다. 오늘은 실제로 가구도 덜 옮기고.
하루종일 하는 알바를 하루 해보고 나면 2일차엔 모든 게 더 잘 보인다. 누가 일을 더 하고(알바는 이게 곧 잘하는 것과 같지만...) 덜 하는지도 보이고 알바를 대하는 담당직원의 성향도 대충 나온다. 그래서 2일차엔 이 알바에서 내가 비집고 들어가야 할 내 자리를 자연스럽게 찾아들어가게 된다.
과거 내가 알바를 하면서 자주했던 실수 중 하나가 처음부터 지나친 의욕을 뿜어서 안 해도 될 일과 그에 따른 책임감을 함께 뒤집어 쓰는 것이었다. 한창 관계라는 단어가 머릿 속을 가득채웠던 때라 고용주의 반응과 현장의 분위기를 신경쓰는 게 항상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고, 잘 하는 알바라고 칭찬 받으면서 더러운 일만 더 하는 호구알바가 됐다. 물론 좋은 결과로... 예를 들면 잦은 단기 알바 기회가 주어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젠 알바가서 일 잘한다는 걸 칭찬으로만 받아들이진 않는다.
오늘도 어김없이 새것들이 뿜어대는 먼지 덕분에 실내공기는 서울같다. 더 있으면 머리가 아플 것 같아서 자연스럽게 내 역할을 스스로 교체해본다. 그리 시급하진 않지만 해야 하는 일, 동시에 그리 어렵지 않으면서도 오래 걸리고, 일하는 티는 팍팍 나는 그런 일을 골라야 남은 시간을 편하게 보낼 수 있다. 알바가 다수인 현장에서는 이쪽저쪽 불려다니며 역할을 수시로 바꾸기 쉬운데 이런 롤을 선점해야 내가 원하는 시간동안 자리를 지키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다. 오늘은 날씨가 그렇게 춥지 않아서 먼지 속에서 헥헥대며 가구를 옮기고 조립하는 일을 할 필요는 없다. 바깥공기도 맡을 겸 가구 박스들에서 나오는 잔재들을 분리수거하러 밖으로 나왔다.
계속 공급되는 빈박스들 덕분에 나는 여유롭게 분리수거를 하고 있다. 폐지를 수거하시는 할아버지의 경운기 짐칸에 박스를 가지런히 쌓아올린다. 밖으로 나와있는 박스가 더이상 없을 때 할아버지는 담배를 한 대 물고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요즘 폐지 시세 얘기, 저기 지나가는 XX가 자신이 쌓아둔 폐지를 훔쳐간 XX라는 얘기... 차선 도색하는 커다란 차가 와서 경운기 좀 빼달라고 할 때까지 이야기를 하시던 할아버지는 경운기 짐칸을 뒤적이시더니 식혜 한 캔을 주시고 가셨다.
다시 돌아온 실내에선 가구배치가 한창이다. 기본 도면대로 배치를 하지만 곧 팀장이라는 사람이 등장하고 러그 하나의 위치부터 차근차근 고쳐나간다. 다른 현장직원들과 달리 짧은 치마를 입고 온 걸 보면 굳이 현장에 직접 손을 댈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런 손이 많이 가는 존재의 등장은 담당자들을 긴장하게 하는 동시에 회피욕구를 불러일으킨다. 팀장을 전담마크 시킬 적당한 알바 셋을 물색할 차례다. 뭔가를 하고 있어야 할 순간이다. 중간에 빼올 수 없을만한 자리를 빠르게 찾아들어가야한다. 나는 블라인드를 잡았다. 1층과 2층 창문은 총 8개. 넉넉하게 1시간 반은 끄떡없다.
알바들을 보내야 하는 시간은 다가오는데 내일 당장 오픈할만한 상황은 아니다. 하나 둘 잡아서 내일까지 하라고 꼬시기 시작한다. 무거운 가구는 다 옮겨서 솔직히 꿀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하지만 이틀간의 진행과정을 보니 지루하게 늘어질 게 뻔하다. 이제부터 하는 일은 뭘하든 알바의 눈에는 크게 티는 안나는 자잘자잘한 일이거나 청소다. 더 편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진행과정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시간이 무지무지 느리게 간다고 생각해서 내일은 거절한다.
아까 점심 먹고부터 알바 한 분이 안 보인다. 열 몇 살 많은 형이었는데 오지랖도 넓고, 말도 많으셔서 이쪽저쪽 돌아다니시면서 흥 넘치게 일을 하고 계셨다. 그러다 직원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는데 사장하고 말싸움이 붙어버렸단다. 그 형은 사장이 자신을 알바라고 무시했다며 근로계약서 쓰지 않은 걸로 고용노동부에 신고하고 본사에 전화를 걸었다. 직원 한 분은 황급하게 피시방에 가시더니 뜬금없는 햄버거 세트와 급조된 근로계약서를 함께 들고 나타셨다. 내용이 너무 허접스러워서 사인은 안 하고 대충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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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량의 증감 및 "갑"의 사정을 고려하는 경우 "을"은 이에 따르며, 업무의 성질 및 특성에 기하여 근무시간을 다르게 조정할 수 있으며, 조정에 의해 야간근로 발생 시 이에 따르는 것에 동의한다.
급여는 임금 산정의 편의를 위한 포괄임금제로써 일체의 연장,야간근로수당 및 사실상 계속 노무제공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주휴수당을 포함하여 지급함을 이해하고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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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7시 라는 근무시간을 정해놓고도 이런 문구를 넣어놨다. 연장근무를 시켜도 안 할 거긴 하지만 연장근무를 해도 돈을 안받겠다는 내용에 사인을 하라는 건데 알바들 불러다 놓고 내용은 별 거 아니라고 요약하신다. 자신들이 겁나서 뒤늦게 부랴부랴 근로계약서를 쓰는 상황이라고 솔직히 말하는 게 덜 우스울 것 같다. 읽어보지도 않고 거침없이 사인들을 적어낸다. 내가 안 쓰고 있으니까 알바 한 분이 왜 안쓰냐고 물어보길래 저게 무슨 말인지 알려주고 퇴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