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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답정킴 May 25. 2022

아직 잃음에 익숙치 않은 나이

그건 앞으로도 그럴 것같아요



우리는 자라면서 많은 것을 잃고 산다. 

먼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얼굴의 탄력. 

그리고 어렸을 적 가지고 있던 그나마 높은 텐션 

초조함, 수치심, 뭐 눈엔 잘 안 띄는 그런 것들도 잃기도 한다. 

그리고, 어렸을 때 기억이나 단어 같은 것들도 왕왕 잊어버린다. 


그런 것들은 가끔 억지로 찾을 때도 있고, 영영 잃을 때도 있다. 







삼십년을 넘게 잃어가며 살았는데, 

어째서 잃음은 익숙해지지 않는 걸까.

잃는 과정은 대부분 스며드는 것과 같아서 

그렇게 느끼지 못했던 걸까. 


사실 크게 잃는 경우도 많았다.

사랑하던 사람이 어느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떠난 때도 있었고,

누구보다 가까웠던 친구가 어느날 친구를 그만둔 적도 있었다. 

내가 아끼고 사랑했던 강아지와 이별하기도 했고, 

사자마자 작별해야만 했던 미놀타 카메라도 있었다. 







크고 옅게 잃어가는 동안, 

오히려 잃는 것이 무서워졌으면 무서워졌지, 

잃는 것이 익숙해지진 않았다. 


잃음은 언젠가 다가올 잃음을 연상시키고 

그래서 잃음은 당장의 잃음에만 머물지 않고 

미래의, 그리고 또 과거의 잃음까지 등에 업고 나타났다. 


잃음만은 결코 잃을 수가 없었다.






최근에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것을 잃었다. 

내 생의 모든 잃음을 다 합친다고 해도, 

그 고통들을 엮어서 더 큰 고통을 만든다고 해도,

그 잃음보다는 클 수는 없었다. 


하나의 상실이 많은 것들의 상실로 이어졌다.

너무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곳이었으며, 

어느 순간에도 나를 끝까지 믿어줄 사람이었으며

누구보다 나의 행복을 바라던 사람을 잃었다. 


잃었다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아니, 잃었다고 해도 될까. 

그런 생각이 불쑥 든다. 









한용운의 시에 보면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다는 시구절이 있다. 

뭐 언젠가의 수업에서 님을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구절이라고 배웠던 것 같다.

왠지 곰곰히 되씹는다. 


그와는 조금은 다르지만, 나도 엄마를 잃을 수만은 없었다. 

아니, 엄마를 잃는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내가 잃은 많은 기억에도, 잃지 않은 기억에서도 

그리고 지나는 풍경에서도, 어떤 사소한 내음에서도, 엄마가 좋아했던 꽃에서도, 

엄마가 좋아했던 브랜드를 볼 때에도 

엄마는 항상 존재했다. 


또 가끔 나는 어디선가 보고 있을 엄마에게 말을 걸곤 한다. 

되도록 안 봤으면 하는 모습일 때에는 모른 척하지만. 

엄마라면 나를 응원해 줄테니까. 엄마라면 내가 잘 지내길 바랄테니까. 


그런 생각들이 실존의 엄마는 아니더라도, 엄마를 존재케 한다. 





많이 아픈 나날들이었다. 

아직도 이렇게 기억을 마주하는 게 너무 힘들고 괴롭지만

그래도 조금씩이라도 엄마에 대한 기억들을 남겨보려고 한다. 


유독 내가 우는 걸 싫어했던 엄마는 

이렇게 또 울고 있는 나를 보면 울지말라고 다그칠지도 모른다. 

그게 엄마의 서툰 위로법이었으니까. 


그래도 엄마,
나는 아직도 이렇게 잃는 게 너무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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