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중의 을'이라는 에이전시에서 14년째 일하면서 느낀 것들
'을' 중의 '을'이라는 에이전시에서 14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광고 에이전시입니다. 기업이나 브랜드로부터 의뢰를 받아 그들의 일을 대행해주는 바로 그 일 말입니다.
요즘들어 '탈 에이전시' '탈 대행사' 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대행업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누군가 의뢰한 일을 하는' 업이기에 사람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가 크고, 의뢰인의 성향과 기호, 성격, 상황 등에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힘들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겠지요.
다수의 고객으로부터 우리의 상품이나 서비스가 선택받지 못한다면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흔히 광고주(혹은 담당자)라고 말하는 의뢰인들과의 커뮤니케이션과 관계 설정, 만족도 달성 등으로 평가받는 일이다보니 사람이 사람을 대하면서 겪는 스트레스와 자존감 하락, 불필요한 감정 소모 등이 적지 않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요즘처럼 나 자신을 돌보는 것이 중요해지는 때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저 역시 그런 시절들을 거쳐왔습니다. 10년이 넘게 일을 해왔으니 '라떼는 말이야'라고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 시기들을 거쳐오면서 "다 그러려니" 하기 보다는 내 일에 대한 정의와 일을 대하는 태도를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에이전시 일이 (항상 즐겁지만은 않습니다만) 충분히 가치있고 만족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고객의 성공을 돕는 전문가다
저는 제 일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고객이 스스로 하기 어려운 일을 비용을 내고 전문가에 의뢰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러한 일을 고객으로부터 의뢰받아 좋은 결과까지 연결시킬 수 있도록 수행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하기 싫은 일을 돈주고 맡기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우리 고객의 '헬퍼(helper)'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들의 마케팅, 광고, 커뮤니케이션을 전문적인 영역에서 그에 준하는 실력과 노하우를 가지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관점은 에이전시 종사자만의 정신승리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세탁을 전문적인 드라이클리닝까지 할 수 없어서 세탁소에 비용을 내고 맡깁니다. 스스로 병을 치료할 수 없어서 병원에 가서 비용을 내고 진료를 받죠. 약에 대한 전문적인 정보나 지식 없이 제조할 수 없어서 약국에서 돈을 내고 약을 사먹습니다. 집까지 빠르고 편하게 가고 싶어서 그에 대한 전문성(실력과 장비 모두)을 지닌 택시에 비용을 지불합니다. 모두 우리가 직접 하기 어려운 일에 비용을 내고 서비스를 제공받는 일입니다.
저는 에이전시의 일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남의 허드렛일을 해준다'는 관점도 있겠지만 '나의 전문성을 유료로 고객에게 제공하여 더 좋은 성과를 거두게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고객이 우리의 서비스를 전문적이라고 느끼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고객이 우리의 서비스를 전문적이라고 느끼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맞습니다. 고객이 우리의 전문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고민하는 아이디어, 전략, 제안서, 실행 모두 고객의 입장에서 그 전문성을 인정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모든 고객이 우리의 전문성을 올바른 시선으로 바라봐주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분명 있지요. 모든 이를 다 납득시키라기 보다는 최대한 우리의 고객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노력해보자는 이야기입니다. (대행사, 에이전시에 근무하는 모든 분들 화이팅입니다!)
전문성을 팔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노력이 필요합니다. 먼저 나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추어야 할 것이고, 자신이 가진 전문성을 다른 이들에게 잘 팔 수 있는 나름의 세일즈 능력도 필요합니다. 하루 아침에 쉽게 갖춰질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이러한 능력들을 갖추기 위한 노력 또한 필요하죠.
고객에게 '전문성'을 팔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그들로부터 '신뢰'라는 보상을 얻게 됩니다. 이 '신뢰'의 힘은 막강합니다. 그들과 더 많은 신뢰가 쌓일수록 절차는 간소화되고 일은 더 쉬워집니다. 저는 이 원리를 데이비드 마이스터의 글과 책으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는 '컨설턴트의 컨설턴트'라는 별명을 가진 학자입니다. (그의 책 '신뢰의 기술'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절판되었지만 중고책으로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좋은 책이에요.)
저는 '어떻게 하면 고객이 떠나지 않고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일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할 적에 제가 존경하는 멘토로부터 이 책과 데이비드 마이스터의 이론들을 추천받았습니다. 큰 도움이 되었지요. 여러분께도 권하고 싶습니다. :)
알고보면 거의 모든 일이 대행업에 가깝습니다. 업의 특성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몇 년 전 어느 겨울, 저는 '고객의 성공을 돕는 커뮤니케이션 전문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그 결심 이후부터 제가 하는 일의 가치가 무척이나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전문가'가 되고 싶었고, 제 전문성을 고객에게 세일즈하고 그들과 신뢰를 쌓고 싶었습니다. 물론 항상 좋은 결과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남의 일을 해주는 일'이라는 생각에서는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고객이 저의 전문성에 비용을 지불하고 그들과 신뢰를 쌓을 수록 맨파워 중심으로 움직이는 대행사 내에서 저의 가치 또한 높게 인정받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 대행업 종사자분들께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자신의 일을 좀 더 가치있게 바라봤으면 좋겠다고, 모든 일이 마음대로 되진 않겠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더 성장하고 가치 또한 높아질 수 있다고 말입니다.
오늘도 자신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하루 하루 많은 업무들을 해나가는 모든 대행사 분들,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