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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exandra the Twinkling Jan 23. 2017

자유로운 시절 일기 20

즐거운생활시작. 영국편. 둘.(부제: 이상한 꿈. 하나)

부제: 이상한 꿈. 하나.

이때 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희한한 꿈을 꾸기 시작한 건.


비현실적인 연지색인지 선홍색인지 비스무리한 핑크빛 색상의 도톰한 카펫이 온통 바닥에 빈틈없이 깔려있고 벽은 회반죽처럼 거칠고 오돌토돌한 느낌이지만 온통 크림색인, 그리고 커튼마저도 핑크 레모네이드 칼라이다. 창문도 바닥에서 약 30cm 정도 위에서부터 천장까지 쭉 뻗은 거의 전창에 창틀도 온통 크림색으로 영화에서처럼 격자무늬 창틀이다. 아래 사진보다는 천정이 더 높아서 창이 더 크게 뻗어있고, 라디에이터도 똑같은 크림색이다. 심지어 침대 맞은편의 붙박이장과 선반, 붙박이 화장대도 크림색이고 침대 헤드도 카펫처럼 핑크 계열인 연지색이다. 침대 위도 핑크 계열인 헤드와 비슷한 연지빛 침구가 깔려있고 문조차 무늬 하나 없는 크림색이다. 창에서는 햇볕이 터질 듯 들어와 눈이 부시고 나는 그 따뜻하다 못해 따가운 햇볕을 등지고 카펫이 포근하게 느껴지는 맨발로 침대와 붙박이 화장대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서 한가롭게 잡지를 뒤적이고 있다.

꿈 내용은 기억 안 나는데 희한하게도 주변 풍경을 색깔과 촉감, 느낌까지 자세하고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고 나를 제삼자처럼 바라보고 있는 시점이다. 깨어났는데도 꿈속의 기분이 연장된 것처럼 나른하고 느긋하고 따뜻하다. 기분이 참 따뜻하고 좋다.

한동안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 꿈은 한 번이 아니었다.


사진은 하얗지만, 커다란 창, 같은 색의 라디에이터, 따뜻한 색의 벽, 바닥의 도톰한 카펫이 분위기가 비슷해서 퍼온사진
이런 핫핑크는 아니지만; 핑크계열 선홍색의 바닥과 크림색 파티션이 대략 비슷한 분위기라서 퍼온사진

(상상을 해보시라고 사진을 퍼옴.ㅎㅎㅎ)





학교가 끝나고 필립은 매일같이 우리 반 앞으로 왔고, 나는 조금이라도 수업이 일찍 끝나면 재빨리 학교를 빠져나가버렸고 바로 학교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면 마주칠까봐, 한 정거장을 걸어간 후에 다음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집에 갔다. 하지만, 늦게 끝나거나 비슷하게 끝나면 너무나 당연하게 필립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네가 싫다고 당당히 말을 해 보아도 필립은 헤실헤실 웃으며 자신도 원래 어울렸던 내 친구였던 것 마냥 다른 친구들하고 잘 어울리며 붙임성 있게 굴었다. 내 친구들도 자연스럽게 필립을 좋아했고 그게 조금 짜증이 났었다.

그날도 학교 마지막 수업 끝나기 10분 전 즈음에 선생님에게 조금 일찍 가야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혼자 나왔다. 같은 반이었던 야에꼬와 신따로는 눈치챘다는 듯이 약간 놀리는 표정으로 같이 가자고 잡았고 완전범죄를 위해 오늘은 진심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허겁지겁 교실을 나섰다. 1등으로 학교에서 나와서 다음 정류장까지 사람이 거의 없는 길을 혼자 걸어가는데 햇살도 오늘따라 영국 같지 않게 쨍쨍했다. 기분도 좋고 필립이 나중에 우리 반 앞에서 내가 없다는 걸 알아챘을 때 표정을 상상하니 왠지 뿌듯해졌다.


"요즘 재미 좋나 봐? 학교에서 남자들 좀 후리고 다니나 보지? 하고 다니는 꼴도 예전 같지 않네? 이게 본모습이었구먼? 이년이 나한테 꼬리 칠 때 알아봤어. 내 허락 없이 집을 나갔더라? 그래도 난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배은망덕한 것아, 갚을 건 갚아야 하지 않냐?"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릿속이 하얘지고 혈압이 떨어지면서 손발이 차갑게 굳었다. 심장은 세게 뛰는데 숨쉬기는 너무 어렵다. 너무 어지러워... 정말 공포스러우면 말이 안 나온다는 걸 처음 알았다. 눈은 주방장 아저씨를 째려보고 있는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데 목이 꽉 막힌 것처럼 목에 힘을 주는데도 말은커녕 비명도 안 나온다. 우연인지 아님 일부러 찾아온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세상에서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혐오스럽고 공포스러운 얼굴이었다. 아니, 두 번 다시 보게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다리도 덜덜 떨려 도망갈 수도 없었지만 뒤돌면 바로 잡힐 것 같아서 간신히 뒷걸음질 쳤다.

뒷걸음 쳐봐야 니가 어떻게 도망갈거냐며 좋게 말할 때 자기 집으로 가자며 팔을 붙잡았다. 정말 공포 때문에 혈압이 점점 떨어져서 숨도 쉬기 힘들고 다리도 굳어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귀에서 윙 소리가 나면서 너무 어지러워 쓰러질 거 같았다.


"이게 어디서 또 수작이야?  이러면 저번처럼 경찰이 와서 도와줄 것 같으냐? 바람난 년 잡아가는 거라고 하면 니말 아무도 안 믿어. 빨리 일어나라. 나 화내는 꼴 보기 싫으면"


뭔가 너무 무서운 일을 당할 것 같아서 눈을 꼭 감고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일단 정신 차리자. 일단 혈압이 돌아오게 정신 좀 차리자. 이러면 도망도 못 가잖아. 눈물이 흘렀다. 내가 저혈압인 게 너무 원망스러웠다. 날씨 좋다고 헤실거린 것도 바보 같았고, 괜히 거짓말하고 수업 다 안 하고 일찍 나온 것도 바보 같았고, 그까짓 필립 하나 따돌린다고 노력한 내가 그냥 다 바보 같았다. 그냥 친구가 되고 싶은 거일 뿐인데 혼자 오버해갖고 내가 뭐 그리 잘났다고... 이 순간에 그런 후회하는 것조차 우스웠지만.


Aleksandra? Are you Ok?


가슴이 철렁했다. 필립의 목소리다. 이런 바보 같은 모습으로 이런 무서운 사람과 얽혀있는 모습이 너무나 창피해 죽을 것 같아 가슴 철렁하면서도 너무 반가운 목소리였다. 얼굴을 들고 고개를 돌려 눈물이 얼룩진 얼굴로 필립을 쳐다보자 막혀있던 돌덩이가 굴러간 듯 목소리가 개미처럼 기어 나왔다.


나 안 괜찮아. 도와줘...


아저씨는 꺼지라며 스페인어를 섞어가며 욕을 하고 얘는 내건데 바람이 나서 어쩌고 하며 집에 데려가야 한다고 그러고 필립은 아저씨를 막으면서 날 아저씨에게서 떼어내고 실랑이를 벌이고, 아저씨는 힘으로 안되니 몸으로 자꾸 필립을 밀었다. 난 안도감에 눈물줄줄 흘리면서도 무슨 일이 날까 봐 조마조마하고 아저씨가 필립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봐 무서우면서도 아무것도 못하고 혹시 경찰 안지나가나 두리번거리며 발만 동동 구르는데 필립이...


닥쳐. 얘가 대체 왜 니꺼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 여자 친구거든?
나는 오늘 너를 보는 게 여기서, 오늘이, 마지막이고, 또 내가 널 보는 날은 니 인생에서 매우 불행한 날이 될 거야.


라고 아주 무섭게 또박또박 잘라서 얘기했고, 아저씨는 힘으로도 딸리고,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날 째려보면서 어디 두고 보자. 하고 자꾸 흘끗흘끗 돌아보며 갔다.


난 바닥에 주저앉았고 미안해, 고마워 이 말만 계속했다. 잠시 내 머리를, 등을 쓰다듬어 주던 필립은 날 아무 말도 안 하고 일으켜 세웠고, 바지도 털어주었고, 눈물을 닦아 주었고, 천천히 이마에 그리고 양쪽 눈에 뽀뽀를 해주었다. 그리고는 날 반쯤 안은 채로 걸어갔고 난 걷는 건지 들려서 가는 건지 모르게 따라갔고 그 길의 모퉁이를 돌자 세워져 있던 차의 조수석에 날 태웠다.

그 와중에도 응? 얘도 영국에서 어학연수하는 학생일 텐데 왠 차? 하는 생각은 했다. 그런 내색은 할 수 없었고 이젠 너무 창피해서 눈물도 그쳤고, 이 자리에서 펑하고 사라졌으면 하는 소원만 빌고 있었다.

여전히 아무 말 안 하는 필립은 출발을 했다. 어디로 가는지 물을 용기도 안 났고 민망함과 창피함과 어색함 때문에 분명히 내 얼굴은 엉망일 텐데 거울도 꺼내 볼 수 없었다.ㅠㅠ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얼핏 밖을 보니... 어어어? 센트럴 쪽으로 가고 있다. 아니 이 몰골로 대체 이 상황에 왜 센트럴이지??? 아놔; 30분 지나도록 아무 말도 없으니 답답해 죽을 거 같았고 자꾸 아까의 상황이 떠오르고 얼룩덜룩할 내 얼굴이 떠올라서 창피해 죽을 거 같았다. 이래도 저래도 난 오늘 내 명이 엄청 단축되었을 거라는걸 느낀다. 그리고 이 세상에 초자연이 존재했다면 날 이 자리에서 제발 증발시켜달라고 빌었을 거고... 슬며시 필립을 쳐다보는데 뙇;

눈이 마주쳤다. 필립은 활짝 웃으면서,


바깥을 봐. 해가 너무 반짝반짝 빛나서 우울해하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워. 거울도 좀 봐봐. 난 진짜 괜찮은데 네가 차에서 못 내릴 것 같아.


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내 맘속을 읽었나; 얼른 거울을 꺼내보니... 후덜덜했다. 대충 아이라인 번진 것만 지우니 조금 정상인다워졌다.


우... 리... 어... 디... 가?


목구멍에서 굼벵이가 기어 나왔다...;;;


거의 다 왔다고. 반짝거리는 햇살을 즐기러 왔다고. 잠시 빛을 잃은 나의 aleksandra에게 빛을 나눠달라고 부탁하러 햇님 만나러 왔다고...


평소에 들었으면 상당히 오글거리는 대사였을텐데 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 거울 또 봐야 해...

필립은 눈이 동그래져서 내가 그렇게 슬픈 소리 했냐고 물어보며 미안하다고 울지 말라고 하며 또 눈물을 닦아주었다. 우린 차에서 내렸고 필립은 가만히 내 손을 잡았고, 내가 손을 슬그머니 빼내려 하자 힘을 꼭 주었다. 필립은 내 손을 잡고, 우린 하이드 파크를 말없이 걸었다.


런던 하이드 파크
런던 하이드 파크
런던 하이드 파크


나아아아중에 안 사실이었는데, 내가 필립을 따돌렸다고 생각하고 학교 앞 버스 정류장을 이용하지 않고 한 정거장을 걸어서 다음 정류장을 이용한답시고 사람 없는 런던 북부의 그 길을 룰루랄라 걸어가며 내가 참 영리하다고 만족해할 때마다 필립은 차를 타고 그 길을 지나가며 나를 보았고, 내가 버스 타는 모습을 항상 지켜봐서 어느 길을 따라 걸어가는지도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역시 그날도 내가 안보이자 바로 내가 있는 곳을 찾아서 따라온 거라고.


어쨌건, 필립은 너무 따뜻하고 긍정적인 아이였고, 마음도 넓고 배려심도 있어서 내가 민망해할까 봐 그 일에 관한 얘기는 꺼내지 않더라..ㅎㅎ; 우린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필립이 차에서 꺼내온 담요를 깔고 잔디에 앉아서 한참을 별 말없이 앉아있었다. 왠지 그러고 있으니 내 마음도 풀리면서 자연스레 필립을 쳐다보며 미소도 지어지고 필립도 다 안다는 듯이 말없이 날 꼭 안아주고.

필립의 말은 마술 같았다. 햇님한테 빛을 나눠달라고... 라니... 정말 빛을 되찾은 것 같이 해가 질 무렵에는 웃으면서 필립하고 차분하고 조곤조곤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 있었다. 필립은 다행이라고, 이제 나에게서 빛이 난다고 했다.

저녁을 먹고 집에 가는 길에 기분이 정말 묘했다. 하루 사이에 세상이 시커메졌다가 핑크빛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싫던 사람이 너무나 고맙고 좋은 사람이 되었고, 팍팍하고 안 좋은 일도 많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긴장해서 지내던 런던이 하루아침에 즐겁고 할게 많은 곳이 되어버렸다.


집에 도착하자, 하숙집 아줌마는 미리 저녁 먹고 온다고 연락을 안 했다고, 그리고 늦게 왔다고 화를 내셨지만 죄송하다고, 너무나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내가 웃으며 말하자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는 꼭 미리 연락을 해달라고 하시곤 그냥 들어가 버리셨다. 하숙집을 옮겨야 할 것 같다. 갑자기 할 게 많아졌다.

주방장 아저씨와의 악몽같은 사고가 난 후에 급하게 그 집을 나왔고, 주눅이 들어서, 만사에 조심해야 할 것 같아서, 또 소심해서, 다 참고 경직되어 형식적으로 날을 채우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멀쩡하게 즐겁게 살아야 할 것 같았다.

먼저, 옷장도 없어서 책상 위에 옷을 쌓아놓아야 하고 옷걸이에 걸어야 하는 옷은 몰래 커튼봉에 걸어야 하고 너무 좁아서 책상 의자는 뺄 수도 없으며 샤워는 하루 한번, 15분 이상 하면 안 되고, 수건도 하나 빨기 힘들고, 라디에이터는 고장나있고, 냉장고는 절대 열어봐선 안 되는 곳에서 나가야 했다. 아침식사로 주는 딱 두장의 삶은 베이컨은 물이 흥건했고, 너무나 돼지 냄새가 역하게 났고, 토스트에 바르는 버터와 잼도 터무니없이 부족했고, 하루에 우유는 한잔, 쥬스도 한잔, 차도 두 잔밖에 못 마시고 저녁식사는 맛이 없어도 다 먹어야 했고, 배만 채우게 하려고 감자를 너무 많이 줬다. 무엇보다 주인아줌마가 만사에 너무 신경질적이다.

내일 메트로(신문 이름)를 구해서 하숙이나 플랫을 알아봐야겠다. 동네도 이렇게 사람 없는 북쪽 말고 조금 더 내려가 보자.

자려고 누워있는데 내일을 맞이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붕 떠올랐다.


마치 런던에 오늘 도착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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