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크루 2022. 100일 프로젝트
2022년을 100일 남긴 시점이었다. 라라크루 단톡방에 호스트인 수호작가님이 사진 한 장을 띄우셨다.
이름하야 "라라크루 쑥과 마늘 프로젝트"
모집공고 글을 보자마자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라라크루를 만나 글도 열심히 쓰고, 책도 열심히 읽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 드는 의문(이게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인가?)과 회의감(제대로 살고 있는 건가?)에 이미 찌들 대로 찌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건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의문과 회의감을 당장 해결하지는 못해도 당당하게 잠시 덮어 둘 수 있는 비장의 카드를 찾아낼 기회. 머리를 열심히 굴려보았다. 무언가 가시적인 성과가 있는 것을 하고 싶었다. 100일이 지났을 때 누구한테든 "난 100일 동안 이런 결과물을 만들어냈어!"와 같은 어떤 대단한 것이 나에게는 필요했다.
하지만 이미 프로젝트는 시작되었고 오늘 내로 결정짓지 못하면 남들보다 하루 뒤쳐지게 된다는 생각이 나를 옥죄었다. 마늘과 쑥 프로젝트 자체가 경쟁이 아닌 격려가 기본임에도, 나 자신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완수 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완벽주의자도 아니고 완수 주의자는 뭐냐? 완벽과 같은 어떤 성과에 완성도가 아닌 일단 내가 해야 하는 어떤 임무를 처음부터 끝까지 했는가 안 했는가가 중요한 사람이 바로 완수 주의자다. (내가 만들었다. 뇌피셜)
그래서 결정했다. 가장 피하고 싶었지만 늘 묵직하게 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던 아이들. "디즈니 스크린 영어회화" 책들을 한 권씩 독파해보기로 한 것이다. 이 시리즈들은 내가 작년에 진짜 영어공부를 제대로 해보자는 의지를 다지며 자율연수비로 무려 10권이나 종류별로 샀던 책들이다. 그러나 진짜 한 장도 넘겨보지 않은 채 책장에 고이 모셔둔지 1년. 이제 때가 도래한 것이다.
슬며시 마늘과 쑥 단톡방 공지사항에 내 목표를 댓글로 남기고 책장 앞에 섰다. 미녀와 야수, 겨울왕국 1,2, 코코, 뮬란 등등 내로라하는 디즈니 영화 주인공들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쟁쟁한 경쟁자들을 다 물리치고 내 손에 올려진 인물이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모아나"였다.
"모아나"는 사실 내게 너무도 생소한 캐릭터였다. 디즈니 하면 역시 신데렐라, 백설공주, 벨, 인어공주가 아닌가!? 최근에는 겨울왕국 시리즈가 디즈니를 다시 살렸다는 얘기도 들리고, "코코"와 같이 어른들의 감성을 적시는 영화도 나오긴 했지만, "모아나"라는 인물은 정말 들어본 적도 없는 캐릭터였다.
그런데 우리 딸이 작년이었나, 올해 초였나 갑자기 "모아나"영화를 보여달라고 했다. 그래서 얼떨결에 같이 보았고 딸보다 내가 더 감명을 받았다. 내용은 선택받은 주인공이 자신의 부족을 구하기 위해 어떤 역경도 다 이겨내고 끝내 구해냈다는 아주 뻔하고 뻔한 스토리이지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울림이 있었다. 주인공들의 대사 하나하나에서, 눈빛 하나하나에서 가슴 찡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리고 책장 앞에서 그 감정들이 다시 되살아났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첫 책으로 모아나를 선택했다. 그리고 바로 시작! 책은 총 2권으로 스크립트 책과 워크북으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스크립트 책만 읽을까, 하다가 그러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어 두 권을 다 병행하기로 하고 시작! 너무 뿌듯했다. 내가 드디어 내 손으로 영어공부를 시작하였구나. 2022년이 가기 전에 뭐라도 남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괜스레 든든했다.
그렇지만 역시나 고비는 찾아왔다. 완수 주의자 경향이 슬금슬금 고개를 내밀더니 어느 순간 하루 30분 공부가 족쇄가 되어버린 것이다. 변수가 없는 평범한 날들에는 30분 공부가 아주 즐거웠지만, 예상치 못한 이들이 벌어져 몸이 너무 피곤하거나 마음이 심란할 때는 식탁 위에 있는 책만 봐도 한숨이 절로 났다. 게다가 가장 최악인 건 아이들을 재우다 그냥 잠들어 버려서 결국 인증을 못하고 지나간 날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스트레스 지수가 치솟았다.
"아악!"
하루 빼먹었다고 누가 질책하지도 않고 큰일이 벌어지지도 않는데 스스로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불을 붙였다. 의지에. 그동안은 없는 시간을 쥐어짜서 겨우겨우 해왔다면 이제는 30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든 나를 위해 만들어내야 했다. 평소 일과를 되짚어보니 역시나 틈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아예 직장에 책을 가져다 놓고 해 볼까, 했지만 업무 특성상 교직원들이 내가 있는 사무실에 아무 때나 들락날락하다 보니 괜히 공부하는 모습이 자주 비치면 근무태만으로 비칠까 봐 포기했다. 어쩌다 운이 좋아 새벽에 잠이 깨서 했던 적도 있으니 아예 이참에 모닝 미라클을 해볼까, 했지만 몇 번 시도한 끝에 우리 아이들은 엄마가 옆에 없으면 30분이 채 되지 않아 잠을 깬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
"아악!"
결국 지금처럼 아이들에게 "잠깐만 잠깐만"을 반복하며 해야 하나 좌절하고 있는데 뜻하지 않은 순간에 나에게 절대적인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아이들이 "tv 보는 시간"!! 아이들이 영상 보는 시간에 나는 주로 빨래를 개거나 아이들 가방을 정리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이 시간은 집안일을 하는 시간이 아니다! 내 공부가 먼저다! 그날 이후로 아이들이 만화를 보기 시작하면 나는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아 책을 폈다. 만화 속 주인공들이 너무 요란해서 약간 방해도 되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 계속 계속하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생활소음인 양 아무렇지도 않았다. 물론 어쩌다 새벽에 눈이 떠지거나 뜻하지 않은 공백시간이 생기면 책부터 편다. 그렇게 인증을 하고 나면 하루가 얼마나 개운한지 모른다.
모든 영화나 드라마가 서두는 재미가 없듯이 모아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점점 주인공들이 활기를 띠고 줄거리가 절정을 향해 가자 뒷내용이 궁금해 그런 날은 "아.. 지금 몇 챕터를 다 해버리고 인증만 하루하루 할까" 하는 고민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프로젝트의 본질이 매일매일 꾸준히 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기에 바로 마음을 다시 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다가온 모아나와 헤어질 시간. 마지막 장을 넘겨 뒤표지가 나오자 기분이 묘했다.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던 영어책을 벌써 한 권 다 끝내다니. 역시 함께하는 힘은 강하다는 걸 새삼 다시 깨달았다. 모아나를 끝내고 다시 설레는 마음으로 책장 앞에 섰다. 그다음 선택은 무엇이 될까. 두 번째 책이 끝나는 달 다시 한번 소회를 남겨보고자 한다.
쑥과 마늘도 함께라면 먹을 수 있다. 쑥과 마늘 프로젝트를 시작해주신 수호작가님께 다시 한번 감사함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