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싸움이 반복되지
몇 년 전, 나보다 더 회계에 관심이 많으신 교감선생님 앞에 친분이 남달랐던 어떤 선생님과 함께 서있던 적이 있다. 이유는 지금까지도 누구의 업무인지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채, 그냥 흘러가는 대로 운이 없는 사람이 맡아하는 수밖에 없는 특정 업무 때문이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교감선생님은 삼자대면 중에도 계속 선생님을 바라봤지만, 누가 들어도 나의 논리가 더 명확했고 설득력이 있었다. 결국 못마땅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교감선생님은 이번에는 나의 말이 맞는 것 같다며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나는 당연하게 당연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지만, 상대 선생님은 이해하지 못했고 그렇게 우리의 사이는 묘하게 벌어졌다.
사람들은 가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하고, 웬만하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충돌 없이 풀어나가려는 나를 보며 진짜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런 친분이 어마어마한 걸림돌이 되어 내 뒤통수를 칠 거라며 걱정을 한다. 그리고 사실 나도 알고 있다. 나도 이 바닥에서 짬이 몇 년인데, 그런 상황을 안 겪어봤을까, 그럼에도 내가 이런 태도를 유지하는 건 뒤통수를 맞는 상황보다는 서로의 친분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나의 신조에 보란 듯이 금이 가는 상황이 최근에 발생했다.
문제의 시작은 한 선생님이 그동안 자신의 전임자들이 해왔던 업무 중에 하나를 자기 업무가 아니라고 인지하면서였다. 그런데 참 놀랍고도 소름 끼쳤던 건 그 업무가 앞에 언급한 업무와 똑같다는 것이다. 진짜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그 업무는 누구의 손에 안착하지 못한 채 이렇게 미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울고 짜고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은 후 나는 결심했다. 정말 적을 만들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 내 상황이 녹록하지도 않고, 자꾸 이런 식으로 나에게 업무를 넘기려 한다면 이건 좌시할 수 없다.
그래 한판 떠보자.
비장하게 마음먹고 출근을 했는데 해당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잠시 와달라고. 뭐야, 싶었지만 일단 가보기로 했다. 아무도 없는 장소에서 당사자들끼리 얘기하는 게 어쩌면 문제가 더 커지지 않고 해결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오산이었다. 선생님이 제시한 조건은 나에게 한없이 불리했음에도 자신의 이런저런 상황을 설명하는 선생님께 반박할 수도 없는 아픈 이야기가 쏟아졌다. 오 마이 갓. 결국 나의 의견은 통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일단 상의해 보겠다고 말하고 자리를 피했다.
내 자리에서 고민을 10분, 20분.. 안 되겠다 싶어 상사에게 말을 꺼냈다. 어찌하면 좋겠냐는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러기도 했고, 그걸 일개 직원인 나에게 지속적으로 묻는 실장님이 도대체 어떤 저의를 가지고 계신 건지도 모르겠어서 진짜 굳어버렸다. 그런데 일이 터져버렸다.
내가 이 상황을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한 상사는 담판을 짓기로 결정하고 그 선생님을 불러 대화를 가장한 싸움을 벌인 것이다. 진짜 말 그대로 싸움이었다. 누구 하나 상대방의 의견을 들어주기보다는 한마디라도 더하고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높이고자 악을 쓰는 싸움. 그 가운데서 정작 당사자인 나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과 시체와 같이 차가워지는 손을 겨우 붙잡고 버티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 싸움은 반복될 것인가. 좌절감과 절망감, 그리고 상사에게 고마워해야 하지만 이런 방식을 원하진 않았기에 위축된 나의 마음까지. 한동안 봄이 온듯했던 사무실엔 이제 침묵의 찬바람이 불고 있다.
바람이 분다. 찬바람이. 서늘한 바람이. 지긋지긋한 분쟁의 불씨는 또 어디에 숨어있는 걸까. 어디에 숨어있다가 또 누군가에 의해 불타오를까. 그리고 불어올 바람은 또 얼마나 싸늘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