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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을리 Jan 01. 2023

새해 첫 날

이것은 짧은 일기


새해의 첫날에 - 너무 복잡하게 얽혀 내 깜냥으로는 풀어낼 수 없는 - 엄마와의 싸움을 뒤로하고 나온 스타벅스에서, 형원이가 준 기프티콘으로 마차라떼를 마시며, 어제 산 책을 뒤적거린다.


모든 일에 대한 불평을 혁신적인 방법으로 늘어놓는 움베르토 에코의 책을 낄낄대고 읽는동안 나의 불평은 조금씩 뒤로 밀린다. 책을 읽는 척하며 옆에 앉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몰래 듣는다. 아들이 4년제를 다니다 전문대 토목공학과로 다시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듣다 말고 괜히 울화통이 솟는다. 전문대를 가도 괜찮은건데. 그래도 사랑받을 수 있는건데. 사년제를 갔기 때문에 대기업을 갔기 때문에 나의 가치가 있다 생각했던 그 때의 내가 좀 안쓰러운가보다. 엄마에 대한 화와 좌절스러움이 뒤섞여 이상한 미움도 솟는다. 자랑을 하며 본인이 우쭐했을 엄마의 얼굴이 왠지 실제로 있었던 일마냥 눈앞에 그려진다. 그럴거면서 날 인정해주지 않았어, 아직도 풀리지 않은 감정때문에, 미워하고 싶은 이유를 찾느라 뇌가 바쁘다.


대화는 계속 이어져서 전문대 다니는 아들을 둔 아줌마 앞의 아줌마의 집에는 차가 세 대라는 말이 오간다. 내가 세들어 살던 윌리엄스버그의 집에는 오십대의 백인 커플이 사는데 차가 네대가 있었다. ‘그거 대충 맞는 말이구만’ 이라는 말을 살짝 바꿔서 ‘그거 대충 백인 같구만’ 이라고 흑인 친구가 자주 얘기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백인 가정에는 남아도는 차가 많아서 백인 아이들이 차가 필요한 시점이 되면 친척들이 남은 자동차 하나를 생일선물 삼아 주는 것이 흔한 일이라고. 백인 남자 동기의 차가 망가졌을 때 그는 부모님이 안 쓰는 suv 한 대를 받았다. 백인 같은 일이다.


윌리엄스버그와 m전문대와 움베르토에코는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 없는 소재들이지만 씁쓸하고 우유비린내 적당히 섞인 마차라떼와 섞여 꿀꺽꿀꺽 잘도 넘어간다. 재밌다. 온통 겨울 옷을 입은 검은 머리의 사람들이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재잘재잘 한국어로 떠드는 이곳에서 나는 흰머리의 사람들이 칼로리 꽉꽉 찬 미국음식을 건강하다 생각하고 먹으며 영어로 왈왈대는 파네라에서와 정확히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남의 이야길 들으며 적당히 책을 읽다가 이상한 생각들로 빠졌다 다시 돌아온다. 이상하게도 그 때 눈앞에 펼쳐졌던 한없이 평화로운 윌리엄스버그의 가을 나무들보다 사람들 분주히 지나다니는 부천 상동의 길거리와 모건시티, 하이퍼관, 예비고전용관 같은 별 알 수 없는 말들이 시끄러운 저 간판들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아들내미들을 독립시키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알바를 언제 시킬 것인가를 두고 외동아들에 대한 토론이 한창이다. 저것은 사랑일까? 사랑인 것 같다. 나는 그 사랑이 부러우면서도, 저것이 설마 가지지 못한 남성성에 대한 끊임없는 longing인지 의심한다. 어떤 모습이면 뭐 어떤지. 주식장은 망했지만 가정이 평안하고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말로 어느정도의 정적이 흐른다. 뜻대로 되는게 없네요. 정말 그러네요.




미국에 있는 친구들이 해피뉴이어 하는걸 보니 그 땅에도 새해가 드디어 왔나보다. 그래 이놈들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이 이기적인 놈들아. 새해가 어디에서 어떻게 오든 미국에서 오는 새해만 새해인줄 아는 놈들아. 미국놈들 중에 진짜 새해를 챙긴 이는 일본 사는 놈 밖에 없었다. 올해는 아무 의미도 없지만 왜 설레는지 모를 일이다. 좋은 일만 있어라. 이런 소망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이 ‘뜻대로 되는게 없는’ 세상을 손잡고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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