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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니피캇 Mar 23. 2023

진리가 무엇인가?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진리가 무엇인가?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1. 화두


 예수 그리스도의 사형판결에 앞서 로마의 총독이던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진리가 무엇인가?"

 이 장면에서 예수님과 빌라도의 대화는 여러 번을 읽어도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나는 전체적으로 예수님의 입장과 복음서를 쓴 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인가?" 묻는 장면에서는 언제나 갑자기 빌라도의 감정과 생각에 집중하게 된다. 


 '현인 또는 성인, 또 심지어 구세주나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소문이 무성한 이 남자를 흥분한 현지 토착 권력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군중이 몰려와 고발한다. 유다 토착권력에게 이 예수라는 사람은 자기네 종교적 권력을 위협하는 존재이지. 자기네의 전통규범에 따르면 그는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칭했으니 신성모독으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은 그런게 아니라 자신들의 권위를 저 남자에게 빼앗길 것을 두려워할 뿐이지. 이건 저들의 주도권 싸움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둘 중 하나의 편을 들어 이 세력 다툼을 최대한 손쉽게 평정하리라. 그래야 내가 편안하게 통치할 것이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예수라는 자는 왜 현실 정치나 권력으로 대항하지 않는 것인가? 실력을 발휘한다면 그를 따르는 세력 또한 충분한 힘을 모을 수도 있을 터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로마의 총독이다. 나와 로마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판결하면 그만이다. 예수의 세력은 모래알 같고 정치권력으로 힘을 행사하지 못하니 예수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실익이 없다. 현재 토착권력은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이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 판결하면 나로서는 쉽다. 이 군중이 원하는 대로 사형을 선고하려면 예수라는 이 사람이 스스로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칭하면 간단히 반역죄로 엮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의 말과 행동은 나의 이런 합리적 판단을 주저하게 만든다. 그의 가르침이나 기적에 관한 소문이 두렵기도 하다. 혹시 정말로 신의 계시나 능력을 받은 사람이거나, 이 사람이 받은 판결에 이성을 잃은 추종자들이 나를 공격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그러므로 나의 사적 감정과 판단을 이 사람의 재판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 일에서 도덕적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다. 최대한 건조하고 객관적인 입장으로 총독으로서의 임무에만 충실할 것이다.'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대가 이스라엘의 왕인가?" 하고 반복해서 묻는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자꾸 빌라도의 현실적 목적과 의문을 비켜가는 답변을 하는 것 같다. 성경에서는 이런 장면이 자주 나온다. 제자들이나 사람들의 질문에 예수님의 답변은 자주 수수께끼처럼 갸웃하게 한다.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질문이 잘못되었다면 질문하는 자는 원하는 답변을 들을 수가 없다. 질문하는 자는 원하는 답변의 범위를 이미 정해 두고 묻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냐는 질문은 성립하지 않는다. 빅뱅이 시간의 시작이기 때문에 '이전'이 없다.) 일을 쉽게 처리하기 위해 빌라도는 예수가 "내가 이스라엘의 왕이다." 또는 "아니다."라고 답변하기만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빌라도 입장에서는 뜬금없는 답변이었겠지만, 앞뒤의 맥락을 제거하면 이 말은 틀림없이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선언이다. 이제 이 상황에 내 상상 속의 연기자들을 투입시켜 보자. 빌라도를 연기하는 배우가 "당신이 이스라엘의 왕인가?" 라고 묻자, 예수를 연기하는 배우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차분히 바라본다. 잠시 후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은 어떤 이유로 그런 질문을 하는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가 있다. 다윗과 솔로몬과 같이 국가를 통치하는 왕이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참된 왕은 항상 하느님 한 분 뿐이었다. 그러나 온 세상의 하느님은 이스라엘만의 왕도 아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대의 질문은 잘못되었다. 내 나라는 그대가 생각하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대들은 왕이라는 표현을 쓰면 명확하리라 생각하지만 그 생각도 잘못되었다. 그것은 상징이고 비유일 뿐이다. 굳이 '나라'라는 표현에 비유한다면 나의 나라는 처음부터 있었고 본래의 진리다. 그대들은 스스로 만들어낸 상징에 가려서 진리를 보고 듣지 못하고 있다. 그 자체로 받아들여라. 진리는 모든 것이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대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내가 해 줄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대답은 이것 뿐이다. 나는 그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그대의 몫이다." 

이 사건을 '진리'와 연결하려는 생각에 조금도 미치지 못했던 빌라도는 어리둥절하며 되묻는다.


 "진리가 무엇인가?"


 국어사전에 진리는 '참된 이치, 참된 도리'라고 되어있다. 철학적으로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우주 어디에서나 보편적으로 성립하는 법칙이나 사실'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이보다 더 깊은 철학적 해석은 평범한 사람들을 더욱 진리에 속하기 어렵게 만들므로 철학자들에게 맡기기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고정관념에는 언제나 진리란 온 세상을 아득히 감싸는 높고 심오한 차원의 어떤 것으로 새겨져 있다. 무의식 중에 학자들의 어려운 설명에 동의하는 지도 모른다. 진리라는 것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높은 정신적 성취를 이룬 극히 일부의 위대한 스승들만이 도달하는 무엇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나같은 평범한 이에게 어떤 의미인가? 보통의 인간을 초월한 성인들만 도달하는 것이 진리라면 이기적 욕망과 세상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우리 평범한 사람들이 과연 예수님의 구원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도대체 예수님이 말한 '진리에 속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예수님은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빌라도의 다음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빌라도가 궁금해 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질문 후에 유다인들이 있는 곳으로 휙 가버린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흥분한 군중이 폭주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협상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다. 진리에 관심이 없는 빌라도도 진리에 목마른 나도 진리가 무엇인지 여전히 모른다. 내가 모르기는 모르지만, 모른다기 보다는 처음 묵상하는 사람처럼 항상 어설프다. 거룩한 성인들과 위대한 철학자들처럼 알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그들처럼 멋지게 말하고 싶고 그들처럼 세상을 초월한 듯 높은 경지에 오르고 싶다. 


2. 구도자


 싯다르타를 지금에야 읽게 된 것은 내 편향 때문이었다. 나는 평생을 천주교 신자로 살았고 다른 종교나 그들의 사유 방식을 공부해 보려고 진지하게 노력한 적이 거의 없다. 1962년~65년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는 타 종교에 대한 대화와 존중을 약속하고 가톨릭 교회 밖의 구원에 대해 부정하던 교만한 태도를 벗기로 했다. 구원은 교회 안에 있든 밖에 있든 간에 하느님의 고유한 권한임을 선언하고 타종교에 대한 역사적 단죄 행위를 모두 철회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선언은 선언이고 2천 년을 가져온 고정관념은 그렇게 한 번의 선언으로 사람들의 마음에서 즉시 사라지지는 않는다. 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나고 훨씬 뒤에 태어났지만 내가 자라 온 가톨릭 교회의 현실적 분위기는 아직 공의회의 정신이 제대로 꽃피지 못했던 것 같다. 신을 찾는 길은 가톨릭이 최고라는 고정관념과 종교적 편향이 자연스럽게 자라났다. 그러나 나는 느릿느릿한 교회의 변화를 변호한다. 모든 사람들이 공의회의 변화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의회가 이렇게 거대한 전환을 선언하게 된 데에는 2천 년의 역사와 철학, 사상, 과학의 발전이라는 과정이 서서히 녹은 결과다. 이런 내용을 모두 생각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선언이다. 그러나 누가 이런 거대한 생각에 관심을 가지겠는가. 우리는 대부분 복잡한 생각을 싫어하여 최대한 단순화 하거나 권위있는 누군가가 콕 짚어 주는 것을 바란다. 게다가 이성의 변화보다 감성의 변화는 더 느리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들이 어지러워하지 않도록 천천히 기다리며 나아가야 했다. 실수를 인지했을 때 변화가 빠르면 좋겠지만 느린 사람들은 항상 있는 법이다. 언제나 개인의 변화보다 군중의 일원으로서의 변화가 훨씬 느릴 수 밖에 없다.

  

 아무튼 이런 종교적 편향의 이유로 헤세의 작품들,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를 중고등학교 시절 읽었고 성인이 된 후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도 읽었지만 '싯다르타'는 일부러 외면했다. 줄거리를 알아서가 아니라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이 책을 펼쳤다. 그 이전까지 이 책의 주인공이 석가모니 부처님인 고타마 싯다르타인 줄로만 알았다. 역사소설이 아니거니와 불교의 사상에 가까워 보이지만 엄밀히 불교에 관한 소설도 아니다. 이 책은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헤르만 헤세의 내적 여정이다. 내가 만일 어린 시절 성급하게 이 책을 읽었다면 당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아무 기억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에서 나는 한 사람의 구도자라고 할 수 있다. 구도자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내가 구도자를 규정하는 기준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세계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관계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다. 너무나 실제적이고 본질적이며 인간만이 던질 수 있는 위대한 질문이지만, 질문하지 않아도 사는데 하등 문제가 없는 그런 질문이다. 나의 구도자로서의 애끊는 마음은 이런 것이다. '그렇게 구도의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진리에 다가갈 수 없다는 말인가. 오 주여! 그렇다면 제 주변의 여러 사람들과 가난과 고통에 짓눌려 그런 질문을 할 여유가 없는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은 어쩌란 말입니까.' 나와 같은 사람을 헤세는 싯다르타의 오랜 친구 고빈다에게 투영했다. 어쩐지 친근한 느낌의 이름이더라니. 고빈다는 현자라고 불리는 뱃사공이 자신의 옛 친구인 싯다르타임을 알아보지 못하고 묻는다. "사공이시여, 나는 늙었으나 아직 구도하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사명처럼 생각됩니다. 제가 보기에 당신도 구도해온 사람처럼 보입니다. 존경하는 이여, 나에게 한 말씀 들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싯다르타의 입을 빌린 헤세의 깨달음은 나와 같은 고빈다들에게 맑은 종소리처럼 울려온다. 헤세의 가르침을 내가 이해한 바 대로 요약하고 다시 살을 붙여 2023년의 감각에 맞는 싯다르타로 정리해 보았다.

 

 - "고빈다여, 그대는 너무 지나치게 구하시는 것 아닌가? 구하기에 전념한 나머지 찾지 못하는 것 아닌가?" 구하는 것에 집중하면 다른 것을 보고 듣지 못한다네. "구한다 함은 하나의 목적을 갖는 것이네. 반면에 발견한다 함은 자유롭게 열려있는 상태요, 목적을 갖지 않는 것이라네." 열려있으려면 그 하나의 목적을 내려놓아야 한다네.

 고빈다! 내가 발견한 것 중 한 가지는 이런 것일세. 즉, "지혜란 전달될 수 없다는 말이지. 현자가 전달하고자 애쓰는 지혜의 소리는 보통 사람들에게 항상 어리석게 울리는 법이네." 보통 사람들은 지혜로운 이들이 '초월적' 지혜를 얻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한다네. 그것을 보고 나는 알았네. "지식은 전달할 수 있어도 지혜는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지혜를 발견할 수 있고, 지혜롭게 살 수 있고, 지혜의 힘을 입어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지혜를 써서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지혜 그 자체를 말하거나 가르칠 수는 없네."

 내가 발견한 최고의 사상은 이것일세. "모든 진리는 그 반면(反面)도 하나의 진리라는 것일세!"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진리의 일면일 뿐이네. 전체일 수가 없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전체를 알아볼 수 없네.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이 세상에 대해서 정확히 말해주려고 해도 인간의 말이 완전하지 않으니 완전하게 표현할 수가 없다네. 마치 3차원의 존재가 4차원의 존재를 이해는 커녕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 게다가 친구여, 자네가 질문 할 때 자네 마음에서는 이미 진리가 무엇인지 한정지어 둔 것은 아닌가. 진리는 거룩한 것인가? 그렇다면 거룩하다는 표현을 붙이지 않는 것들은 어떠한가? 밥을 먹거나 똥을 누거나 몸에 때가 끼거나 누추하거나 지저분하거나 고약한 냄새가 나거나 화를 내거나 슬퍼하거나 서로 미워하거나 이렇게 우리가 낮게 평가하는 세상은 어떠한가? 이런 것들은 세계의 신비로움이 아닌가?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라는 것 때문에 항상 착각하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흐름의 시간이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걸세. 그러나 "시간이란 실재하는 것이 아닐세." 공간도 마찬가지라네. 시간과 공간은 같은 것이니 말일세. 그것을 깨닫게 되면 달리 보인다네. 번뇌와 행복, 악과 선, 과거와 현재 이런 것들은 실재가 아니라 한낱 비유에 지나지 않는 걸세. 우리는 부족함에서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닐세. 우리의 3차원적 사고로는 이것을 표상할 수 없지만 시간과 공간의 흐름이 착각임을 이해하면 달리 보일 걸세. 죄인에게 이미 부처가 있는 것일세. 모든 어린이 속에는 백발의 노인이, 생명에는 죽음이, 모든 죽어가는 존재에게는 이미 영생이 깃들어 있지. 그렇게 볼 때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완전하다네. 우주는 풍선처럼 팽창하고 우주의 모든 존재가 엔트로피의 변화를 겪네. 그러나 그 변화가 생멸은 아니네. 시간이 없던 빅뱅의 특이점을 상상해보게. 상상이 잘 안 되지만 실은 어떤 것도 근원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네. 자꾸만 나와 너, 이것과 저것을 분리하고 나누어야 하는 사고방식으로는 깨달을 수가 없다네. 


 소설 '싯다르타'는 불교와 인도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듯 하지만 헤르만 헤세는 아마도 한계를 짓지 않는 구도의 길을 원한 것 같다. 나는 헤세가 성프란치스코나 마이스터 엑카르트 같은 그리스도교 신비사상과도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 (범위를 제한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부족하여 불교나 다른 종교의 영성가들은 잘 알지 못한다.) 


 우리 각자는 물리적으로 육체가 독립되어 있는 까닭에 모든 것을 분리하고 대상화한다. 나와 너를 분리하고 나와 세상을 분리한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진리 또는 절대자로서의 신을 대상화하고 우리의 말과 행동과 생각을 진리나 절대자를 향한 노력 또는 과정처럼 여긴다. 믿음이라는 것은 신을 나와 별개의 존재로 설정하고 그에게 사랑 또는 충성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나도 예수 그리스도께 하느님을 찾고 싶다고 기도했고 공경하는 성인들에게 삶과 가르침을 읽으며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거룩한 이들을 묘사한 예술작품이나 문장들은 내가 원하는 핵심에서 언제나 침묵하거나 보일듯말듯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나의 심각한 고민이 깨달은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 아닐까. 헤세는 고빈다에게 자기 깨달음을 전하는 싯다르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묘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처님의 그 오묘한 미소를 상상하게 한다. 


 3. "시간이라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닐세." 


 바로 이 문장이다! 아주 잠깐이지만 나에게도 미소가 떠올랐다. 헤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염두에 두고 이 표현을 썼을까. 그렇든 아니든 이것은 물리학적 사실이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데 세상은 시간적 차이를 두고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절대적 시간의 배경이 존재하고 그 안에서 물질들이 변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짧게는 우리 각자의 인생에서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변화, 길고 긴 역사 속 선조들과 아직 알지 못하는 미래의 인간 또는 존재자들에게로 이어질 변화. 오랜 생멸의 시간 한 가운데, 지금 이순간 나는 있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면, 이런 변화들은 변화가 아니다. 시간이 없다면 지나간 것들이 사라진 흔적도 아니다. 우리는 엔트로피의 변화로 인한 시간 흐름에 밀려 가고 있지만 신은 그렇지 않아야 한다. 진리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으로 생멸하는 것 같지만 진리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한 순간의 공간을 같은 시간의 영역으로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신은 시간에 밀려가는 변화에 종속되지 않고 시간을 초월하여 알파와 오메가의 모든 것을 파악한다. 철학자 조지 버클리(1685-1753)의 말처럼 신은 '보는 자'이고 신의 지각 안에 있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있는 자, 바로 그"이므로 존재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라고 생각하는 것들이나 미래라고 생각하는 것들이나 모두 그자체로 완성된 존재자들이다. 완성된 창조물들이다. 부족함처럼 보이는 것들은 부족함이 아니다. 실패처럼 보이는 것들도 실패가 아니다. 결과를 향한 과정처럼 보이는 것들은 미완성이 아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이런 것들은 인간의 해석이지 존재의 본질적 실체가 아니다. 플라톤은 본질 세계를 이데아(Idea)로 분리함으로써 인간이 보는 세상이 실체와 다름을 주장하였고, 칸트는 우리의 인식 틀의 한계 때문에 실체로서의 물자체(物自體)에 접근할 수 없다고 하였다. 즉, 우리 인간은 언제나 자기 해석의 틀에 걸리기 때문에 순수하게 객관적인 존재 그 자체를 알기 어렵다. 철학자들의 이론이 옳고 그름을 떠나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진리를 완전히 담아낼 수 없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하다. 그러므로 헤세의 통찰은 얼마나 지혜로운지! 헤세가 지적한 인간의 한계는 편향된 해석과 감정만이 아니다. 실제를 보는 능력도 마찬가지다. 3차원을 넘어서는 공간이나, 시간이 역으로 흐르는 것이나, 빅뱅의 특이점이 과거이면서도 시간 안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 진리는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접근하기 어려운 것이 맞다. 그렇지만 어디론가 가야하거나 높은 지식을 쌓아야 하거나 뛰어난 덕을 행해야 하거나 하는 어려운 과제를 수행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진리가 위대하고 특별한 어떤 존재들만이 고생 끝에 취할 수 있는 깨달음이라면 선택받은 자들의 전유물일 것이다. 설령 신께서 진리를 그런 것으로 존재하게 했다고 하여도 아무도 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게 된다. 진리는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순간 헤세는 이 모든 것을 깨달았나 보다. 진리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지나치게 구하기 때문에 구하는 행위에 집중하느라 보지 못한다. 우리의 많은 생각과 욕구가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이미 진리 안에 있다. 진리에서 벗어날 리가 없다. 다만 나는 스피노자처럼 말하는 게 아니다. 우주 그자체가 진리인지 진리에 포함되는 지는 여전히 모르더라도 적어도 우리가 그 밖에 있지는 않다.

 

 시간 개념의 틀은 아마도 본능일 것이다. 우리 뇌는 그렇게 밖에 못 느낀다. 그러나 실제로 시간은 지금과 같은 방향으로 갈 수도 있고 뒤로 갈 수도 있다. 혹시 시간만으로도 3차원, 4차원이 가능할 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이제 내가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를 과정이라고 본다면 이 순간의 나는 어디로 가는 과정일까. 10년 전의 나는 지금의 나를 향하는 과정이었을까. 지금의 나는 10년 뒤의 나를 향하는 과정일까. 수정란이었을 때 나는 단지 과정이었을까? 죽기 직전의 나는 어떠한가? "하느님이 보시니 좋았다." 했던 그 완성된 존재자로서의 나는 언제 생기는가. 완성되지 못한 존재인 것이 가능할까? 헤세의 사유는 한 사람의 일생뿐 아니라 타자와 나, 세상과 나의 관계로 확장된다.    


 우리는 서로의 낯선 운명에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운명을 이야기하며 다시 새롭게 내 운명을 사랑하게 되리라.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다른 사람에게서 다시 발견하게 될 것이고, 우리의 연대는 점점 넓어질 테고, 줄의 끝과 시작이 우리 손에 들렸으니 지역과 성별을 뛰어넘어 함께 그 줄을 당길 수 있으리라. 이 줄을 커다란 하프 줄처럼 뜯으며 우리의 공통된 삶을 노래하고, 혼자 하지 못했던 영원한 깨달음을 차츰 깨우쳐갈 수 있으리라.
 
- 헤르만 헤세, 밤의 사색


 인간의 육신은 원자 단위에서 7년 만에 모조리 교체 된다고 한다. 10년 전의 나와 현재의 나는 시간과 물질의 교집합이 없음에도 같은 나로 존재한다. 반면에 똑같은 이유로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당당히 각각의 존재자로서 존재한다. 범위를 넓혀 수백 만 년 전, 수십억 년 전의 타자들도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각자 우주의 실재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떨어져 있으면서도 함께 있고 다르면서도 같다. 과거와 현재가 다르지 않고 현재와 미래가 하나이다.


4. 다시, 진리가 무엇인가?


 하느님의 현존으로 들어가자는 초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우주 어디로 가야 하느님 현존이 아닌 곳이 있을까. 하느님의 본성에 반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하느님 현존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진리로 바꾸어 보자. 우주의 보편적 진리를 벗어나는 것은 가능한가? 죄가, 고통이, 온갖 부정적인 것들과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 진리를 벗어 날 수 있는가? 우리는 그 안에서 선하고 악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며, 지혜롭고 어리석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희망하고 좌절한다. 


 우리는 진리에 속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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