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진정한 자유에 대하여. 이념과 사상과 국가와 조직과 정치체제와 본능과 인정욕구와 재물과 명예와 심지어 신앙까지. 우리는 진짜 자유로운 의지로서 그런 것들을 마음에 심고 있는가? 진짜 자유로운 의지로 그런 것들을 마음에 심는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인가?
영화 "영웅"에서 안중근은 기도하며 묻는다. "조국이 무엇입니까? 조국이 대체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안중근에게 조국은 무엇이고, 이토 히로부미에게 조국은 무엇인가? 조국이란 것이 무엇이기에 이 좁은 지구에서, 우주에서 유일할지도 모르는 이 아름다운 이성적 존재들이, 각자의 신념과 욕구 때문에 끊임없이 서로를 죽이고 미워하고 싸우는가? 진정한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 모든 생각은 결코 진정한 자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념과 사상과 국가와 조직과 집단과 본능과 인정욕구와 재물과 명예와 신앙의 노예일 뿐이다! 안중근의 갈등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세상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그가 다른 인간을 죽임으로써 악을 저지해야하는 세상 구조에 대한 슬픔이었다. 안중근은 사랑도 아닌 것들을 세상은 왜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지 묻는 자유인이고 이토 히로부미는 자기 스스로 규정한 신념에 묶인 자, 편협하기 짝이없는 인지부조화의 노예다. 이토와 히틀러 같은 자들은 편협하고 이기적인 신념을 주장하기 위해 타자의 고통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사랑과 자유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자신들의 주장은 완벽하다고 믿고 세상 모든 타자의 자유와 사랑을 목 졸라 죽인다. 사실 그것은 신념도 사상도 아니다. 세상을 제 멋대로 다루고 싶은 일그러진 욕구, 타자를 억압하여 자기를 우러르게 만들고 싶은 고약한 욕구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모든 인간이다.
조르바는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극단적으로 자유롭고 극단적으로 사랑하려는 사람이다. 조르바는 안중근처럼 슬퍼한다.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과 서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슬퍼한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억압하지 않고 스스로도 억압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을 비웠다. 부처님이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라." 하였던 것처럼 자신을 비웠다. 그래서 그는 타락한 자가 아니라 어린이처럼 순수하고 자유로워지려는 사람이다. 이것은 자기 내부에 도사린 무서운 파괴자와의 목숨을 건 싸움이다. 그 싸움에 자기 영혼과 구원이 달렸다. 그리고 조르바는 자신을 이겼다. 예수께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하였던 것처럼 자기 마음 속 세상을 이겼다. 조르바는 침을 퉤 뱉으며 말한다. '조국? 개나 줘 버리라지! 이념? 개나 줘 버리라지! 교회? 개나 줘 버리라지!' 그리고 서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처절하게 슬퍼한다. 그리고는 다시 벌떡 일어나 삶을 걸어간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에서>
- 책꼽문 -
비탈을 내려가면서 조르바가 돌멩이를 걷어차자 돌멩이는 밑으로 굴러 내려갔다. 조르바는 그런 것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나를 돌아다보았다. 나는 그의 눈빛에서 가벼운 놀라움을 읽을 수 있었다. 이윽고 그가 물었다.
“봤어요? 두목, 돌멩이는 비탈에서 다시 생명을 얻는군요.”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놀라운 기쁨을 느꼈다. 나는 생각했다. 위대한 사상가와 위대한 시인도 이런 식으로 사물을 보지 않았던가! 매사를 처음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매일 아침 그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를 본다. 아니, 그저 보는 게 아니라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다.
조르바에게 있어서 우주는 태초에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랬을 것처럼 거대하고 강한 환상이었다. 별은 그의 머리 위를 미끄러져 갔고 바다는 그의 관자놀이에서 부서졌다. 그는 이성의 방해를 받지 않고 흙과 물과 동물과 하느님과 어울려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