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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니피캇 Jun 20. 2023

진리는 결코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무신론자에게 보내는 교황의 편지, 프란치스코 교황 외

무신론자에게 보내는 교황의 편지, 프란치스코 교황 외


1. 진리는 결코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무신론자가 교황에게 물었다. 

- 오직 하나의 진리만 존재하나요? 아니면 사람마다 무수한 진리가 존재하나요? 기본적으로 종교는 핵심 진리에 있어서 배타적이죠. 모든 사상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가 있는데 종교의 경우 계시나 깨달음을 통해 드러나지요. 그 절대적 진리에 일치하는 것이 종교적 구원을 결정하는 거고요. 이러한 보호막이 전제되어 있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 울타리 안에 단단히 머물러 있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종교는 진리에 대해 완고한 입장을 취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 문제에 관한 한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과 대화하기 힘든 것입니다. 가톨릭도 양보할 수 없는 진리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과 예수님이 성자(聖子)라는 것, 삼위일체와 세상 종말에 대한 핵심 교의 말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정체성이니까요. 적어도 이 진리들에 대한 절대적 태도는 유지해야 하지 않나요?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대답했다.


 "진리는 결코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저는 진리가 절대적이라는 이야기를 신자들에게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적이라는 말은 초월적이고 모든 관계를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에 따르면 진리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따라서 진리는 관계입니다." 

 - '절대적'이라는 대립이 대화를 차단하는 어떠한 상황도 발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진리란 주장 해서 관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진리는 사랑하는 관계인데 대립은 사랑을 근본부터 망가뜨립니다. 우리에게 진리의 절대화는 대화를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스스로 진리가 아님을 인정하는 꼴이 됩니다. 대화는 신자로서의 삶에서 부차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대화는 신자들 삶의 필수적이고 내밀한 국면입니다. 진리는 사실이나 지식이 아니라 이치입니다. 지식보다 진리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사랑이고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다른 모든 것을 양보하더라도 사랑은 양보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교리 지식의 크기에 상관없이 타자를 존중하는 상황 속에서 성장합니다. 신자는 교만하지 않아야 하는데 사랑의 진리가 겸손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교가 말하고 싶은 것

다시 무신론자가 물었다. 

-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이미 위화감이 조성됩니다. 신의 아들이라는 어마어마한 자격은 억압적입니다. 그 표현 자체가 무신론이나 타 종교인들에게 반발이나 두려움을 일으킬 수 있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여길까요? 그리스도교의 겸손과 타자에 대한 존중이 참으로 자신을 낮추는 태도로 드러날 수 있을까요? 애초부터 하느님 아들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차별된 신분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교황이 대답했다.

-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가 과거와 현재에 그리고 시간을 초월하여 어떤 존재인지가 중요합니다. 복음서가 보여주는 예수의 이야기는 그가 '권위'를 행사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 권위는 군림하기 위해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뿌려진 그의 말과 행위가 진리임을 보증하기 위한 권위입니다. 교회는 그 권위가 하느님이 부여한 것이라고 증언하지만 당신이 그것을 믿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복음의 모든 기적이나 초현실적 스토리를 제외하여도 상관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증언은 "오직 예수"라는 절대적인 슬로건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사랑하는 분이라는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는 신으로서 인간 위에 군림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 하느님의 아들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는 인간을 위해 봉사했고, 사람들에게 자유와 삶의 충만함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 중에도 사랑을 그치지 않았고 하느님과 이웃에게 충실했습니다. 예수의 권위는 그런 것입니다. 예수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겸손하게 사람들을 사랑하고 대화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사랑입니다. 그는 자신의 전 존재를 바쳐서 사람들 하나하나가 자신이 하느님의 진정한 아들임을 깨닫기를. 그리고 그 자신 또한 하느님의 진정한 아들로서 살아가길 희망합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이어서 대답했다.

 - 그러나 교회는 하느님처럼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교회는 이미 죽은 이들까지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과 많은 전통이 각각의 유전자처럼 진화하여 이루어진 일종의 살아있는 생명체입니다. 따라서 교회도 반드시 진보하는 방향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브라운 운동으로 진화합니다. 자기 소명을 잘 행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못 할 때가 더 많았음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잘하는데 어떤 사람은 잘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느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그분의 몫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결정을 침범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저 기도해야 하고 사랑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의 절대성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의외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몫이 있다는 점이지요. 

 "교회가 아무리 늑장을 부리고 충분히 깨어있지 못하다 하더라도, 그리고 교회 구성원이 많은 오류와 죄를 범해왔고 앞으로도 범할지 몰라도, 예수의 삶을 살고 증거 하는 것 외에는 달리 어떤 방향도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선교하는 게 아니라, 욕구와 소망과 잃어버린 환상과 절망과 희망에 대해 귀 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돌려주고 노인들을 돕고, 미래로 눈을 돌려 사랑을 전파해야 합니다."


3. 우리가 서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나요?

 이번에는 프란치치스코 교황이 물었다.

 "신을 믿지 않는 당신도 분명히 무엇인가 믿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선호하는 중요한 가치들이 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저는 당신이 우주의 본질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아마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자문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저로 말하자면 신을 믿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을 믿는 게 아닙니다. 신은 그리스도교의 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신의 육화(Incarnatio)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신은 창조주입니다. 그것이 당신이 말하는 저의 "생명"입니다. 자, 우리가 서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나요?"




 과거 어떤 교황이 이렇게 포용적인 태도로 말할 수 있었던가? 하느님은 그리스도교만의 하느님이 아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육화라고 믿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더 나은 세상과 더 나은 미래를 이야기하는 데에는 아무런 장애가 없다. 어쩌면 사람들이 신을 알아가는 과정은 과학자들이 과학적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과거의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믿었지만 하느님이 하느님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진리에 도달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을 테다. 교회는 하느님의 그 권리를 감히 규정할 수 없다.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가 이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까지 2천 년이 걸렸다. 과거의 교회가 거짓말쟁이라서가 아니다. 교회를 진화하는 하나의 몸이라고 생각할 때 몰랐다고 하는 것이 옳다. 교회는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교만에서 벗어나 이제 알고자 노력한다.  


 "남을 개종시키려 드는 건 실로 허황된 짓이지요.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어요. 서로를 알고,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대한 이해를 늘려 나가야지요."

 "우리의 주님이 가르쳐 주셨듯이, 아가페는 타인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것은 남을 개종시키려는 마음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입니다. 타인에 대한 사랑, 그것이야말로 공동선의 씨앗이지요."


 프란치스코 교황은 모든 유형의 무신론자들과 냉담 중인 신자들까지 바라보며 대화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성품은 전례 없이 소박하고 누구에게나 마음을 여는 스타일로 평가받는다. 그는 누군가 다가오길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소통을 시도하는 사람이다. "교황의 편지"라는 이 책이 기획된 것도 프란치스코가 세속 언론에 직접 투고하면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이 책은 모든 무신론자들과 냉담자들과 신앙인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전하는 편지다. 다만 2부의 여러 석학들의 칼럼은 개인적으로 반반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파격적인 행보에 대해 쓴 칼럼들인데 일부 좋은 글도 있었지만 대체로 지나치게 현학적이어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친근하고 쉽고 감동적인 글과 대조적이었다. 1부만 읽어도 감동은 충분하다. 종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고 관심이 없는 사람들, 종교의 의미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 종교에서 위로받지 못하고 오히려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프란치스코 교황은 미안함과 사랑을 담아 손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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