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딩거의 아이들, 최의택
슈뢰딩거의 이름을 보고 고른 소설이었는데 마침 SF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SF라기 보다는 성장소설에 가깝다. 내가 SF문학에 대해서 개코도 모르는 것인지 몰라도, 이 책에 대한 SF문학계의 찬사가 나로서는 어리둥절하다. 솔직히 SF라는 장르와는 억지로 끼워맞춘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SF를 좋아하는 이유는 과학적 요소 때문이다. SF는 소설구성의 3요소 인물, 사건, 배경에 과학을 추가한 것 아니겠나? 류츠신의 '삼체'나 릴리 브룩스돌턴의 '굿모닝 미드나이트' 처럼 과학이 작품의 필수요소인 작품을 기대했다. 예를들어 소설 '삼체'에서 양자얽힘이 무엇인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소설의 재미를 크게 좌우한다. '굿모닝 미드나이트'에서는 우주에서 바라 본 지구의 사진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그 장면이 기술되는 순간의 감정에 크게 기여한다.
'슈뢰딩거의 아이들'은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양자중첩의 사태(?)를 설명하기 위한 사고실험이었던 것에 착안했다. 세상이 요구하는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어떤 장애를 가진 이들은 집단에 존재하나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비유가 이 소설의 맥이다. 양자중첩은 인간의 의지가 좌우할 수 없는 과학적 사실이다. 우주 어디에서나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법칙이다. 그러나 차별과 편향은 법칙이 아니다. 인간의 편향된 의식은 진화가 만든 경향이기는 하지만 절반은 자유의지가 선택한 결과다. 그래서 차별을 하면 도덕적 책임이 뒤따른다. 역사를 돌아볼 때 소외받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존재의 중첩 상태가 아니라 언제나 존재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SF로서의 임팩트가 아쉬웠으나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최의택 작가는 소외받는 사람들의 처지를 보통사람들이 볼 수 없는 탁월한 방식으로 그려낸다. 장애를 가진 인물과 장애인 가족을 둔 인물들의 심리와 시선이 서술될 때는 우리가 평소 의식하지 못한 마음속 편향적 태도를 뜨끔하게 끌어올린다. 사회는 장애를 어떻게 보는가? 최근 장애인 대중교통 이동권 문제로 시위가 일어났을 때를 생각해보자. 법은 모든 인간의 평등을 명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장애가 없는 이들을 기준으로 '보통의 인간'을 규정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니까. 법은 그 자체로 영혼이 없다. 사람들이 정하는 대로 정해질 뿐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정하는가? 사람들의 시선은 대체로 두 가지다.
1) 장애가 대중시설을 이용하는데 방해가 되면 안 된다. 그러므로 대중시설은 가장 불편한 사람을 기준으로 설계해야한다.
2) 장애인은 소수이고 일반적이지 않으니 불편해도 양보해야한다. 소수를 위해 치러야하는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영혼이 있는 사람들이 영혼 없는 법을 만들고, 영혼이 없는 법은 다시 사람들의 영혼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이 논의의 핵심은 선택의 합리성이 아니다. 인간을 '비용으로 보는가', 아니면 '관계의 대상으로 보는가'하는 '인간다움'에 대한 논의다. 효율이 지배하는 사회는 장애인을 관계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비용으로 본다. 사람을 효율로 판단하는 뻔뻔한 사람들의 숫자와 그것을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양심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들의 숫자를 합하면 과반이기 때문이다. 법은 그런 여론을 반영할 것이고 보통의 사람들은 법을 보고 생각을 결정한다. 적극적 평등이나 소외된 사람들의 우선적 선택을 주장하는 이들은 시끄러운 사람들, 불편한 사람들로 취급된다. 이 때문에 소외된 사람들은 더욱 위축된다. '슈뢰딩거의 아이들'은 이런 고착화되는 사회 심리의 굴레를 꼬집는다. 사회적 분위기는 군중을 지배한다. 인간을 관계로 보는 사회의 사람들은 가장 소외된 사람들을 배려하는 사회 시스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것이다. 세상을 효율로 따지는 사회의 사람들은 소수자들을 배려하는 시스템을 비효율이나 낭비로 여길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 약자와 소수자인 사람들은 스스로를 타인의 짐으로 여기고 자존감을 잃기 쉽다. 주인공은 농인인 엄마의 약점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사회적 분위기에 울분을 느끼며, 엄마를 부끄러워하는 감정에 죄책을 느낀다. 자, 우리 사회는 어디쯤에 서 있을까?
이 책의 주요 배경은 멀지 않은 미래, 실제와 구별하기 어려울만큼 자연스러워진 가상세계다. 뇌에 직접 신호를 가하는 수준의 가상세계가 구현된다면, 그런 세계에서는 여러가지 장애가 드러나지 않게 될 것이다. 과연 가상 세계가 보편화된 미래사회에는 소외받는 사람들을 대하는 세상의 차별적 구조가 사라질까? 아니면 그런 가상세계에서만 가능한 또다른 유형의 소외가 발생할까? 무리를 짓고 왕따를 만드는 것은 인간의 집단적 본성이라면, 만약 그러한 이유로 인간 사회에 늘 소외된 사람들이 존재했다면 모두가 평등하게 시작할 수 있는 가상현실에서도 주류를 형성하는 자들과 소외된 자들의 구도는 여전히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