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선고에서 부활 직후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1인칭 시점을 상상한 발칙하고 무례한(?) 소설.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어느 쪽도 부정하지는 않지만 신성보다는 인성에 집중한다. 저자는 인간이 '엄청나게 현존'하는 방식을 '사랑, 죽음, 갈증' 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 예수에게도 '사랑, 죽음, 갈증'이 세상에서 엄청나게 현존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로지 인간으로서 느꼈을 가장 중요한 감정과 감각이 무엇이었을지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신성과 인성이 모두 완전한 존재라는 그의 정체성은 곧바로 완전과 불완전의 공존이라는 논리적 오류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현실적인 이유는 아마도 신성 모독의 논란에 말려들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노통브는 금기를 넘어갔다.
군데군데 불편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귀 기울여 볼 가치가 있는 시선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지독한 슬픔을 주는 사랑하는 이들의 배신, 노통브가 가장 집중하는 감각인 갈증, 그리고 사랑하는 어머니가 자신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하는 고통.
그 가운데 십자가 길에서 어머니를 보는 장면과 어머니에게 자기 죽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자식으로서의 고통은 구원과 대속이라는 신적 임무와 갈등을 빚을만큼 강렬하다.
"나는 바닥까지 내려갔다고 믿었다. 그런데 저기, 엄마가 있다. 안 돼. 날 쳐다보지 마세요. 제발, 맙소사. 난 날 보고 있는 당신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깨닫는 당신을 보고 있어요. 당신은 겁에 질려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어요. 그건 연민을 넘어섰고, 당신은 내가 겪는 것을 나 이상으로 겪고 있어요. 자식이 이런 일을 겪을 때는 늘 그러니까요."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가 없었다면 완전한 인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인간적 한계에 막혀 고뇌하지 않았다면 인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타자와의 갈등으로 괴롭지 않았다면 인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예수님도 인간 뇌의 한계 때문에 편향과 오류에 빠졌을까? 특정인과 특정 장소, 특정 사건, 특정 행위에 대해 편애 했을까? 예수께서 보여준 삶은 인간의 모습이었지만 우리는 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인간의 관점에서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2천년 동안 왜곡되었을 것이다. 인간이 불편하게 느끼는 관점이 세대마다 변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그러하겠지만, 조금씩 사실적 본질에 충실하게 바라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신성과 인성이 완벽하게 결합된다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실현이다. 신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가 인간이기는 하지만 인성이라는 것의 경계가 무엇인지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간을 초월한 신으로서 예수는 사건이 곧 끝날 것임을 알았을 것이다. 우주 전체의 시간을 볼 때 그것은 짧다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찰나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고 부활할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인간으로서 겪어야 하는 고통을 그대로 느꼈다. 인간 예수에 대한 묵상은 중요하다. 인간은 아무리 짧은 고통에도 모든 신경과 정신을 빼앗겨 영원한 고통처럼 받아들인다. 인간은 아무리 짧은 사랑에도 모든 신경과 정신을 빼앗겨 영원한 사랑처럼 붙잡고 싶어한다. 예수는 그렇게 인간으로서 고통과 사랑의 시간에 묶였다. 이로써 우주의 모든 순간은 의미를 갖게 된다. 흘러간 강물처럼 한 번 지나가면 찾을 수 없는 과거가 아니라, 분명한 의미를 가진,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된다. 모든 순간은 진리가 된다. 모든 삶도 진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