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에 대한 연민

마니피캇(Magnificat : 찬양하나이다)

by 마니피캇


죄지은 사람 하나를 가운데 두고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민 무서운 눈빛으로

커다란 돌덩이를 내리칠 준비를 하고 있는

군중이 있다.

그들은 법을 지킨다는 정의감으로 무장했다.

그들의 마음속에

'더러운' 죄인은 법에 따라 죽어야 한다는 신념이

손에 든 돌덩이처럼 굳어있다.

군중은

그 죄인을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으려고 악을 쓰고 있다.

서로서로 흥분을 북돋우며

혹시나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연민의 감정을 깨끗하게 지우려 한다.



<요한복음 8;1-11>

1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2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3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4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5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6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7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8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9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1-11)



끔찍한 죄를 저지른 자들에 대한 뉴스에는 끔찍한 댓글들이 달린다.

"죽여야 한다!"

"그 자에게도 똑같은 고통을 되돌려주어야 한다!!!"

"사형시켜라!"

우리도 자주 죄지은 사람을 끌어다 놓고 둘러서서 이렇게 돌을 들고 서 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한 여자를 끌고 예수께 데려왔다. 그 당시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여자는 사형이다. 율법에 능통한 그들이 굳이 예수께 와서 죄지은 이 여자를 어떻게 할까요라고 묻는 행위를 두고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는 술책이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대답은 않고 뜬금없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실 뿐이다. 요한복음이 예수께서 그때 무엇이라고 썼는지는 기록하지 않고 그분이 '손가락으로 땅에' 쓰는 행위를 하였다고만 기록한 것은 분명히 어떤 의도가 있을 것이다. 내용이 아니라 그 행위가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예수께서 땅에 무엇인가 쓴 행위를 보고 모세의 율법이 어떻게 쓰인 것인지를 떠올렸다. 모세가 받았던 율법은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돌판에 새겨진 율법이었다. 출애굽기에 의하면 하느님은 직접 돌판에 십계명을 새겨 주셨다. 이를 토대로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특징짓는 구체적인 율법이 탄생했다. 즉, 율법은 하느님이 주신 법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간음한 여인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도 그 모세의 율법에 있는 내용이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박사다. 일점 일획까지 틀림없이 달달 외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 묻는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권위를 인정하여 묻는 것이 아니다. 만일 동의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율법을 거부하는 자로 간주하여 고소할 계획이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율법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잘 알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가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라고 주장한다.
당신과 하느님 아버지가 하나라면 이 율법은 당신이 만든 법이나 다름없다.
당신의 법에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되어 있다.
만일 율법을 거역한다면 당신의 모든 주장은 거짓이다.
자,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하겠는가?'


예수께서 손가락으로 땅에 쓴 행위를 보면서 율법을 돌에 새겨서 모세에게 주신 창조주 하느님의 손가락을 떠올리게 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자격으로 땅에 쓰셨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유일하게 세상 위에 율법을 쓸 자격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 죄가 없다고도 하지 않으셨고 율법을 지키려는 열정이 넘치는 군중에게 너희가 틀렸다고 나무라지도 않으셨다. 예수는 그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셨다. 그리고 여인에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을 먼저 하셨다. 용서를 먼저 하셨다. 그 용서는 여인이 혐의를 쓰고 있는 죄의 유무와 아무 상관이 없다. 성경은 그 후 그녀가 회개를 하였는지 아니하였는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예수의 행위는

1. 용서

그러고 나서는 약속을 지킬지 아닐지 신뢰할 수도 없는

2. 회개의 요구

이 뿐이다.

그렇다고해서 회개를 조건으로 달고 용서를 해 준 것이 아니다. 여인은 용서받은 후에도 죄를 짓지 않겠다는 아무런 다짐도 하지 않았지만 예수는 무조건적인 용서를 먼저 선언했다.





인간의 모든 시대에는 죄지은 자들을 강력하게 처벌하기를 요구하는 군중이 존재한다. 그들은 죄인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처절하게 안겨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심정적으로 동의할 때가 많다. 살인, 강도와 같은 중죄인에게는 분노와 증오심을 감출 수가 없다.

그렇기에 죄인을 연민하신 예수님의 여러 모습에서 우리는 딜레마에 빠진다. 인류는, 그리고 교회까지도 역사 속에서 항상 선악을 규정하고 선악을 판단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때에는 선악을 구분하라하시고 어떤 때에는 한없이 용서하라 하신다.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구원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이다. 원래 하느님의 자식은 우리가 독생자라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인데 인간에게 예수님과 같은 지위의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다. 아무런 조건이 없다! 그냥 선물이다. 인간과 신은 명백히 다른 존재다. 구원은 인간을 신의 지위로 격상시키는 놀라운 선물이다. 예수님을 통해 인간은 유한한 존재의 틀을 깨고 무한한 하느님의 상속자의 지위에 오른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예수님의 인생을 통해 살펴보자. 곰곰이 생각해보면 하느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결코 황홀한 판타지가 아니었다. 평생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가르쳤지만

군중의 인기를 시기하고 두려워한 기득권자들에 의해 정치적인 이유로 30대의 젊은 나이에 가장 처절한 형벌이었던 십자가의 죽음을 맞아야 했다. 그의 어머니는 평생을 하느님의 명령대로 자식을 키웠으나 죽은 자식을 품에 안아야 하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참혹한 고통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런 예수를 따라다녔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라는 소식을 증언하기 위해 목숨을 빼앗겨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통한 이 구원의 길을 신앙의 본질적인 근거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요한1서 4장 8절, 16절)라고 선포한 부분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의 길을 열어주었다.그 길의 핵심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료하고 단순한 계명으로 요약된다. 하느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얻는 구원의 은총은 하느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초대되었다는 그것이다. 그 사랑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못박은 사람들을 용서하는 사랑이다.


하느님의 자녀는 죄인을 처단하고 구원 받을 조건을 열거하는 율법이 아니라 '죄인조차 용서하라'는 율법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땅에 무엇인가 손가락으로 쓴 행위는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주리라."(에제키엘 36장 26절) 하셨던 예언을 실현하는 상징이다.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삶의 태도 뿐이다.

1. 하느님을 사랑하고

2.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구원, 즉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흥정이 아니라 선물이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대로 잘 살았다고 받는 보상이 아니다! 미사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거나, 교회에 잘 다녔다고 받는 보상도 아니다! 구원은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이고 나와 이웃과의 관계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사실 사랑하는 관계 그 자체다. 하느님과 사람과의 사랑하는 관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하는 관계. 이것은 처벌로 강제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십일조를 바쳐서 선물로 얻는 것도 아니며 높은 분의 명령으로 강제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선행으로 받는 보상도 아니다. 그저 하느님이 누구에게나 주시는 무상의 선물이다.


예수님의 용서는 죄 지은 자의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 지은 자를 바라보는 군중들에게 하느님의 자녀다운 사랑을 기대하는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에게 오직 처벌인가 아닌가 단 하나의 대답만을 요구한다. 죄인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이 신의 율법인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죽일까요? 살릴까요?


예수님은 쭈그리고 앉아 우리 마음에 쓰신다.

'서로 사랑하여라. 하느님의 자녀답게 서로 사랑하여라.'


죄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의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마음속에 다른 모든 감정을 지우고 반드시 처벌이냐 아니냐 가운데 하나의 의지만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죄인에게 죄를 묻더라도, 그래서 우리 사회가 합의한 대로 벌을 주더라도, 죄를 짓고 살아온 그 인생을 불쌍하게 여길 줄도 아는 마음. 인간에게 심어진 하느님 자녀로서의 본성, 그 측은지심을 심지어 죄인에게도 아끼지는 말아라는 가르침이다.


설령 도저히 사회에 함께 둘 수 없는 심각한 상태의 중죄인 일지라도, 어느 시대 또는 어느 나라에서는 죄인의 영원한 격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지라도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연민은 우리 마음에서 지우지 말아라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녀가 하느님이라는 말은 사랑의 자녀는 사랑이라는 말과 같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요한 1서 4:8)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의 자녀다.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드는 이 위대한 변화가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감당해야했던 이유였다. 그분의 제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유였다.


죄지은 사람 하나를 가운데 두고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민 무서운 눈빛으로

커다란 돌덩이를 내리칠 준비를 하고 있는 군중이 있다.

그들은 법을 지킨다는 정의감으로 무장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

죄인은 더러운 자이므로 법에 따라 죽여야 한다는 신념이

손에 든 돌덩이처럼 굳어있다.

군중은 그 죄인을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으려고 악을 쓰고 있다.

서로서로 흥분을 북돋우며

혹시나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연민의 감정을 깨끗하게 지우려 한다.


사랑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그 모습이 슬펐다.

한 조각의 연민도 받지 못할 정도로 세상의 증오를 받는 죄인들이 불쌍하고

죄인들에 대한 한 조각의 연민도 가지려 하지 않는 군중들이 불쌍했다.

군중들은 법을 어긴 자를 처벌할 목적으로

자신들 역시 하느님의 자녀다움을 지우는 슬픈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잊고 다.

예수께서는 슬픔이 북받치어 차마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못하였다.

이 모든 것은 성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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