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마니피캇(Magnificat : 찬양하나이다)

by 마니피캇

"평화"


아무런 어려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고요함이나 평온함을 보고 '평화'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고,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증오나 폭력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려는 노력, 사회구조나 개인적인 문제로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을 구하려는 노력, 마음과 정성을 기울이는 그런 노력으로 '성취해야 하는 것'을 평화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의 부조리를 참지 못해 기어코 불의와 맞서 싸워 이긴 후에야 비로소 평화가 성취되는 것이라고 여기는 태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요한복음 14,27)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 평화와 네 평화가 다른 걸까? 예수의 평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평화와 다른 평화일까? 그분은 우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고 하면서도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과 겁을 내는 일을 경계하라고 당부하셨다. 예수님이 주신 이 평화가 그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함이라면 평화를 받은 그 순간부터 마음이 산란해지고 겁을 내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런데 평화를 준다는 저 장면조차 평화롭지도 않고 비장한 분위기다. 제자들은 이 장면 이후로 세상에 파견되는데, 사람들에게 그저 '서로 사랑하라'고 외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세상은 서로 사랑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일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평화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박해 때문에 전혀 평화롭지 않은 삶을 살았다.


성당에 가면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느끼는 평화로움이 고요한 성당의 분위기 때문이라면 성경과 교회의 온갖 가르침이 다 무슨 소용인가. "성당스럽거나 예배당스러운, 또는 사찰스러운" 고요한 분위기의 장소와 건물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굳이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아니어도 그런 고요함과 평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은 세상에 많다.


예수의 평화는 세속을 벗어나 아무런 걱정꺼리가 없는 고요가 아니다. 고요한 분위기가 주는 평화로운 기분과 느낌은 세상과의 '단절'이지 복음 선포가 아니다. 제자들은 예수께 받은 평화를 품고, '마음을 산란하게 할 수도 있고 두려움을 일으킬 수도 있는' 세상 속으로 가야 한다. 사랑하기를 거부하고 방해하 모든 것들과 언제나 단호하게 대항해야 한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평화를 받았다는 사건의 의미는 감정적, 심리적 평온함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평화가 성취되는 지를 알게 되었다는 의미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요한복음 14:4)


또한 예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오셨다.(마태오복음 10:34)

그리스도인의 평화는 선물이면서 동시에 숙제다. 불의와 싸워야 한다고 하니 타인의 오점를 꼼꼼하게 지적하면서 가르치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탄다. 나에게는 예수께서 주신 정의의 칼이 있으니 정의의 사자가 되어 타인에게 휘두른다.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이러해야하고 저러해야한다고 강요한다. 그러나 틀렸다. 세상에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없다. 하느님께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인간도 없다. 하느님은 이미 모든 존재의 가장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이다. 하느님 자신 외에 누가 감히 하느님께로 이끌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느님이 오지 않으시면 인간의 능력으로 어찌 그분의 가까이에서 살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느님을 보고 듣지도 못하는 주제에 말이다. 하느님은 이미 우주의 모든 존재를 사랑하는 분이다.


예수께서 주신 칼은 나를 이기기 위한 무기다. 인간의 뇌는 태생적으로 자기중심적이다. 그래서 누구나 자기 말만 하려 한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를 타인보다 적어도 평균 이상으로 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가르치려 든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 옳은 길을 자기만 아는 양 선생님이 되려고 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주신 칼이 아니다. 인간 자신의 칼이다. 내 마음 뿐만아니라 타인의 마음도 산란하게 하는 칼이다. 예수께서 주신 칼은 그런 나 자신을 이기기 위한 무기다. 자기중심적인 본능을 이겨내어 타자를 사랑하도록 하는 칼이다. 나 뿐만 아니라 모든 타자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귀한 존재임을 알아보게 하는 무기다. 예수의 칼을 쥐게되면 내면에서 이기적 본능을 넘어야 하는 힘겨운 싸움이 일어난다. 언제나 인정욕구를 추구하는 인간으로서는 고통스럽고 짜증나고 힘겨운 싸움이다. 그 칼을 휘둘러 내 이기심을 무너뜨리면 사랑이 일어난다. 타자에 대한 공감과 연민과 존경이 일어난다. 그때에 내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는 동시에 타인도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러러보게 된다. 그 칼은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태도를 수련하는 칼이다. 비로소 그분이 주신 평화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 고요함을 느끼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치열하게 삶으로 성취해야 할 그야말로 전쟁 같은 사랑임을 알아듣게 된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칼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다.


예수님의 평화를 받아들이고 세상에 파견된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그들의 비장함은 세상과 싸우기 위한 각오가 아니었다. 철저히 사랑을 선택해야 하는 앞으로의 삶에 대한 간절한 다짐이었다. 죽을 때까지 자기 스스로와 싸워야 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기중심적 인간의 본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느님처럼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거대한 업그레이드을 요구하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고통과 불의의 현장에 대한 눈과 귀를 막아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반평화적인 현실을 차단하면 우리는 마음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백하게 그것은 예수께서 주신 그 평화가 아니다. 제자들은 아무 어려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 평화를 버리고, 마음을 산란하게하고 때로는 두려운 마음을 일으킬 수도 있는 희생과 봉사와 사랑을 실천하는 예수의 평화를 살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사탕 파는 노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