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탕 파는 노인들

마니피캇(Magnificat : 찬양하나이다)

by 마니피캇

2015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그날 저녁 아내와 나는 친한 형님 신부님과 몇몇 친구들과 막창 먹으러 갔더랬다. 막창 사진은 없고 막창집에서 구입한 엿을 소개한다.

저녁시간 술집에 앉아 있으면 사탕이나 껌 파는 할매들을 자주 만난다. 10년 전에도 있었고, 20년 전에도 있었다. 그날 만난 할매는 엿을 팔았다. 3천 원이란다. 술 집 안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면한다. 나도 순간적으로 마음이 약해질까 봐 돌아보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그 할매 주머니에 가득한 현금뭉치가 상상되었다. 그런데 순진한 우리 신부님은 그 할매가 딱했나 보다.

"하나 주이소~"

맞은편에 있던 아내와 친구들이 눈짓으로 신부님을 말렸다. 신부님은 싱긋 웃고는 '엿 먹으라'며 하나씩 돌렸다. 할매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복을 빌어주고 옆 테이블로 갔다.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 전 내가 신학생일 때였다. 당시 신학교에서는 월 1회 대주교님의 영성강화 시간이 있었다. 당시 교구장이셨던 이문희 바오로 대주교님의 영성강화 시간에 이 이야기가 나왔다.


"여러분들은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고 질문을 하셨다.


사탕 파는 할매 차가 벤츠라더라, 기사가 대기하고 있다더라, 할매 주머니에 현금 뭉치가 가득하다더라...등등등 여러 카더라 증언이 나왔고 그러므로 속으시면 안 된다고 알려드렸다. 이성적이고 논리 정연한 신학생들의 반응에 대주교님의 대답은...


"여러분,

우리도 속아주지 않으면 누가 속아 주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그 할머니가 돈을 많이 벌면 안 됩니까? 할머니가 죄를 지은 건가요? 생각해 봅시다. 그 할머니가 이윤을 좀 본 것이 우리를 속인 겁니까?"


뒤통수를 세게 맞았다. 그렇게 돈을 벌 수밖에 없는 할매들은 무거운 손수레에 박스나 주으러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노인이 밤중에 껌을 팔고 사탕을 팔아서

현금을 뭉치로 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과연 스스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다(마태 11,25)’ 는 말씀은 진리이구나.


우리 뇌의 공감하는 능력을 담당하는 신경은 자동적으로 타인의 입장을 헤아리고 반응한다.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 나에게도 마음의 아픔이 일어난다. 그래서 껌 파는 할매들이 나타났을 때 절대 사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은 그들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 할매들을 바라보면서도 그들의 고단한 삶에 관하여 아무런 공감의 자극을 받지 않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2004년 사이언스지에는 환자와 그를 사랑하는 보호자의 뇌 영상 실험이 보고되었다. 환자의 뇌는 통증을 담당하는 체성감각피질 부위와 아픔을 인식하는 ACC부위가 동시에 활성화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보호자의 뇌도 아픔을 인식하는 똑같은 부위가 활성화되었다. 이 실험 결과의 의미는 타인의 고통이나 아픔을 공감하는 신경이 발견이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마음의 아픔을 느끼는 것은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신경과학적 반응이었다. 이때 활성화 되는 신경을 거울신경이라고 부른다. 거울의 반사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 저절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만일 거울신경으로 인한 연민의 감정이 조금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사이코패스' 이거나, 뇌의 ACC 교감 신경세포생리적인 문제가 생겼거나, 인지부조화의 극단에서 모든 껌 파는 할매들이 진짜 부자이거나 앵벌이 조직의 일원이라고 믿어버린 결과일 것이다.


우리의 아름다운 공감능력을 껌 파는 할매들 앞에서 왜 그렇게 억눌렀을까. 인간은 관찰의 눈과 인식의 눈을 가졌다. 관찰의 눈은 사실을 그대로 저장하는 눈이다. 인식의 눈은 관찰한 사실에다가 해석하고 평가한 주관적 정보를 첨가한다. 그러므로 사실과 내 인식은 어떻게든 차이가 생기게 된다. 작가 라이언 홀리데이는 이를 두고 인식이 "필요하지도 않은 정보"를 생산한다고 하였다. 나는 사실 껌을 다 판 할매가 벤츠를 타고 유유히 떠나는 모습이나 그 주머니에 가득한 현금뭉치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벤츠와 현금뭉치를 본 경험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사실인지 의심하는 마음도 있기는 있었지만, 벤츠설과 현금뭉치설은 정말 그럴듯하지 않은가! 동정심을 일으키는 할매를 외면할 이유로 이렇게 훌륭한 핑계가 없다.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낸 필요하지도 않은 주관적 정보를 진실이라고 주장하며 우리에게 부여된 본성적인 사랑과 연민의 감정을 검열하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타인을 의심하는 것보다 차라리 내 인식을 의심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 그 할매들이 부자라는 카더라 소문이 거짓이라면 대체 나는 무슨 끔찍한 생각과 행동을 한 것인가. 반면에 만일 그 할매들이 정말로 현금 뭉치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 할매가 잘 살기를 기도하며 엿을 샀던 신부님의 행위는 대성공이다.


2천 년 전,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인간 인식의 오류를 꿰뚫는 가르침을 남겼다.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을 결정한다."

처음부터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면 진실을 알고자 하는 노력보다 내 행동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노력을 집중한다. '틀림없다고! 저 할매들은 벤츠를 타고 다니면서 삥을 뜯고 있어! 확실해! 우리 옆집 아저씨의 친구의 아들의 초등학교 선생님의 남편이 봤다는 증언을 옆동 306호 아저씨가 지나가면서 들었다는 말을 내 두 귀로 똑똑히 들었어!'

이런 식으로 내가 원하는 대답만 찾는다. 그런데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들은 내 생각이 맞는지, 또는 옳은 지 검증하기보다 내가 원하는 대답인지, 내 마음에 받아들이기에 기분 좋은 지를 더 생각한다.


사실 연민을 품을 때 그 할매가 진짜 가난한 사람인지 부자인지의 팩트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내가 사랑을 표현했는지 아닌 지가 중요하다. 만일 그 할매가 사람들을 속이고자 했다면 그것은 그의 선택이다. 설령 그 할매가 나를 속였어도 내가 사랑을 실천하는 선한 선택을 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무엇이 사실인지 확인할 방법도 없다. 의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할매를 외면하면 우리 마음속 사랑의 감정은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실패한 것이다. 어차피 확인할 수도 없는 그 의심을 버리고 사랑을 실천하면 우리 마음속 사랑의 감정은 100 퍼센트 성공이다. 사랑이 성공하려면 계산하지 않아야 한다.

마태오복음은 최후의 심판 날을 이렇게 그린다.

예수께서 의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

그리고 악인들에게는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이 말씀에 의인들과 악인들은 똑같이 되묻는다.

"주님 저희가 언제 그렇게 하였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너희가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복음 25장)


연민은 사람의 본성이다. 거울 신경이 발견되었으니 확신해도 된다. 우리의 거울 신경은 타인의 어려운 상황에 자동으로 반응한다. 이 본성적 반응에 순종하면 아무 이유도 묻지 않고 사랑이 이끄는 대로 사랑하게 된다. 반대로 사랑의 본성적 반응을 거절하기 위해서는 이유가 필요하다. 핑계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 핑계를 만들 때 논리를 만든다. 납득할만한 명분과 분석이 있으면 내 연민과 선행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이든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 똑같이 "주님, 제가 언제 주님을 만났다는 말입니까?"라고 되묻지만 의로운 사람은 항상 계산하지 않고 사랑하였기에 언제 예수님을 만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연민에 순종하였던 것이고, 의롭지 못한 사람들은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자기 삶을 돌아보아도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었다고 항변한 것이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요한 12,8)

가난한 이들은 늘 우리 곁에 있다. 즉,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은 늘 우리 곁에 있다. 물질적 가난과, 정신적 가난과, 괴로움과, 불안과, 혼란과, 죄에 빠진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자신과 동일시했으므로

가난한 이들의 존재는 그분이 늘 우리 곁에 계신다는 표징이다. 그러나 우리가 외면하거나 선별적으로 사랑하면 그분은 늘 우리 곁에 계실 수가 없다.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그분이 항상 우리 곁에 있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라, 인식의 과정을 항상 합리적이라고 착각하는 우리가 그 인식이라는 걸림돌 때문에 이웃을 항상 사랑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대주교님 영성강화를 함께 들었던 형님 신부님은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나보다.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오르게 해주신 그 할매께 감사드린다.





사족 : 그래도 할매들에 대한 의심 때문에 생각의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분들이 계실까봐 사족을 남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수지타산이 안 맞다. 할매들이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간을 저녁 7시~11시, 4시간 정도라고 보자. 가게 3개 정도 다니는데 20분 정도 걸리고, 20분에 3천원짜리 엿 하나정도 판매한다고 치자. 한시간이면 9천원, 4시간 만에 반올림해서 4만원을 벌게 된다. 그 할매가 알고보니 천재적인 영업능력을 가져서 20분 평균 6천원의 매출을 올리면 일당 8만원이다. 은혜 갚는 호랑이가 매일 할매 집에 판매할 엿을 공짜로 갖다 주었을 때의 계산이다. 그러나 혹시 그런 호랑이 아들이 없어서 엿을 직접 구입해서 재판매 하는 것이라면 마진을 계산해야한다. 그렇더라도 아마 박스 줍기보다는 좋은 직업인 것 같다. 그러나 벤츠를 타기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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