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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꿀 Jan 30. 2023

'운전면허' 대신 '솥뚜껑 삼겹살'

열아홉 살의 아르바이트


새해 떡국을 먹고 내 나이 마흔이 됐다. 작년 11월부터 운전면허 학원에 다니고 있는데 중간 중간 무슨 일이 그렇게 많이 생기는지, 아직도 도로주행을 앞두고 있다.


꾸준히 직장생활을 하고 심지어 6살, 4살 남매를 키우다보니 운전 면허가 없다고 하면 사람들은 확신에 차 이렇게 외친다.
장롱면허였구나?”
내가 서서히 고개를 저으면 이번에는 입을 떡 벌린다.
그동안 뭐했니?”


뭐하긴 뭐해, 일했지. 정말이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수능을 치르자마자 친구들은 약속이나 한 듯 면허 학원에 등록했다. 염색, 쌍꺼풀수술,  신기, 남자친구 사귀기, 운전면허 따기. 10대인 우리에게 어른의 상징은 이러했다. 어떤 친구는 수능을 앞두고 어묵처럼 부운 눈으로 나타났고, 졸업식 즈음 예쁜 쌍꺼풀을 보여줬다. 누구는 선생님 시선 따위 아랑곳 않고 파격적인 헤어스타일로 등교했다. 그리고, 대다수의 친구들이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학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많은 선택지 중 내가 택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남자친구를 사귀는 것 외에는 모두 ‘돈’이 들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고심 중인지 알았기에 면허 학원비까지 요구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면허 학원비든 뭐든 일단 돈이 필요해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가게의 이름은 ‘솥뚜껑 삼겹살’이었다. ‘솥뚜껑 불판’이 시그니처였기에 충분히 그런 이름이 붙을만했다. 내가 사는 곳은 제주도한림읍’의 ‘리’로 끝나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사거리 코너에 가게가 있었다.


여사장님과 가족들은 제주도 사람이 아니었다. 생김새에서, 말투에서 거친 바닷바람이 느껴지지 않았다. 중년에 접어든 여사장님은 선이 여리고 얼굴이 조막만한 미인형이었다. 체구가 엇비슷한 남사장님 역시 우리네 아빠처럼 거친 면모가 없고 부드러웠다. 하나밖에 없다던 외동 아들은 또 어떻고. 나보다 한 살 많던 오빠는 내가 봐왔던 시골 머슴아들과 달리 매끈하고 깔끔했다.


솥뚜껑 삼겹살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건 소정 언니 덕분이었다. 소정 언니는 나보다 한 살 많은 대학생이었는데 겨울방학동안 이곳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다. 장사가 꽤 잘 되어서 알바생을 한 명 더 구한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앗싸! 이거 완전 땡잡은 거 아닌가.


소정 언니를 알게 된 건, 어른들 덕분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1993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소정 언니와 나의 부모님은 유독 교류가 잦았다. 내가 살던 마을은 어촌계 마을이었는데, 소정 언니의 아빠도 나의 아빠도 배를 가진 ‘선주(선장)’였다. 언니의 아빠는 ‘물꾸럭(문어)’, 우리 아빠는 ‘고등어’와 ‘갈치'. 주 종목은 달랐지만 바다에서 번 돈으로 가족들이 생계를 책임진다는 점은 같았다.


어른들은 가끔씩 서로의 집에 모여 화투(도박이 아닌 오락일 뿐, 오해하지 말자)를 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만남이 뜸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엄마의 말에 따르면 다퉜다기 보다는 서로 잘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어른들은 멀어졌지만 우리는 아니었다. 어떤 경우, 아이들의 우정은 어른들 보다 깊고 진지하다. 제주 시골마을에서 시작되었던 우리의 우정은 서울에서도 이어졌고, 서른 무렵 긴 세월이 무상하리만큼 단번에 ‘절교’를 하게 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사소한 이유였다. 다퉜다가도 잊어버리고 신 나게 놀던 우리였는데, 긴 세월동안 쌓았던 우정이 칼로 무 자르듯 간단히 정리됐다.(언젠가 털어놓을 날이 오리라)


솥뚜껑 날리기 대결


그해 겨울 방학을 내내 솥뚜껑 삽겹살 집에서 보냈다. 오전 11시부터 밤 11시까지, 무려 13시간을 일했다. 10대 소녀가 무슨 할 일이 있을까 싶지만 식당의 노동은 다채로웠다.


출근을 하면 우선 화장실을 청소하고, 식당 곳곳을 마포걸레로 닦았다. 테이블 위 냅킨을 정리하고, 수저와 젓가락을 채워놓고, 이러저러한 물건을 깔끔하게 정돈했다. 간혹 점심에 손님이 오기도 했지만 피크타임은 저녁이었다. 정신없이 손님이 몰려들면 소정 언니와 나 두 명만으로는 일손이 부족했고, 여사장님을 비롯해 아들까지 투입되곤 했다.


솥뚜껑 불판 위에서 삼겹살이 지글지글 익어가는 풍경은 참 볼만 했다. 자글자글 익어가는 삼겹살과 김치. 절로 군침이 돌았다.

이런 비주얼

지금은 솥뚜껑 불판이 특별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이었다. 문제는 무게도 획기적이었다는 거다. 말 그대로 ‘솥’ 아니던가. 자동차 타이어만큼이나 큰 솥뚜껑을 들어 올리려면 힘에 부쳤다. 뭉툭한 손잡이는 한 손으로 잡아야만 했다. 두 손으로 잡으면 솥뚜껑 둘레에 몸이 밀려 엉거주춤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퇴근을 하고나면 오른쪽 팔뚝이 묵직하게 아팠다.


어느 날, 식당에 솥뚜껑이 날아다녔다. 아저씨 둘이 화기애애 술 한잔 곁들이며 삼겹살을 먹다 벌어진 일이다. 대화를 나누다 격분에 찬 그들은 서로에게 솥뚜껑을 날렸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솥뚜껑이 얼마나 위험한 무기인지 깨달았다.


원반던지는 사람 조각상


솥뚜껑은 힘을 받고 휙 회전하며 날아갔다. 묵직한 솥뚜껑이 날아가는 모습은 뭐랄까, 언젠가 책에서 본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스 고대올림픽(기원전 776~기원후 394), 최고의 인기 종목이었던 ‘원반 던지기’ 말이다. 레슬링 보다도 더 인기가 많았다니 말 다했다. 오죽하면 청동조각상 ‘원반 던지는 사람’까지 만들었을까. 기원전 485년 경 빚었다는 이 조각상을 보면, 몸동작 하나하나가 몹시도 역동적이다. 등과 무릎을 굽힌 남자가 한 손에 원반을 잡고 던질 준비를 한다. 마치, 이 아저씨들처럼!


우리가 말릴 새도 없이 둘은 투사가 되었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인명 사고는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그릇이 깨지고 박살나고 식당 곳곳이 엉망이 되었을 뿐.


아르바이트를 하다보면 별의별 일들을 겪는다.  당시에는 무서웠지만 지금 생각하니 조금 재밌다. 언제 눈앞에서 솥뚜껑 날아가는 광경을 보겠느냐 말이다.


뾰족구두를 사다


한 달이 지났고, 드디어 월급을 손에 쥐었다. 쥐꼬리만 했지만 현금을 손에 쥐자(당시에는 월급을 현금 봉투로 줬다) 하고 싶은 게 마구 떠올랐다. 운전면허 따위는 생각날 리 없었다. 어차피 면허를 따봐야 당장 실력을 뽐낼 자가용이 없었다. 장롱면허가 될 게 빤한데 거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러저러한 자기 합리화 끝에 가장 급선무 과제부터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쇼핑. 그렇게 소정 언니와 버스를 타고 상가가 모여 있는 시내로 나갔다. 나는 언니에게 어떤 옷과 어떤 신발을 사야할지 물었다. 생각해보면 언니는 그다지 옷을 잘 입는 편도, 센스가 있는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언니는 대학생이 아니던가. 분명 신데렐라 이야기처럼 나를 확 바꿔줄 거라 여겼다.


구두 가게에서 언니는 대학생이 되면 반드시 뾰족 구두를 신어야 한다고 했다. 언니가 고른 건 앞코가 뾰족하고, 7센티가 넘는 검정색 힐이었다. 구두코 위에 징 버클 장신이 달려 있는, 어쩐지 부담스럽게 생긴 구두였다.(꼭 영화 ‘가위손’의 주인공 에드워드가 신을 법한 느낌의 장식이었다.)


나의 에드워드


사실 나는 다른 구두에 마음이 뺏겨 있었다. 동글동글 코가 귀여운 애나멜 구두. 슬쩍 내 마음을 말했더니 언니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구두 하면 뾰족 구두지!


당시 언니의 말은 내게 법 그 자체였다. 결국 나는 월급 중 일부를 떼어 그 구두를 샀다. 그리고 대학 생활 내내 구두는 신발장에 처박혀 있었다. 내 스타일도 아닐뿐더러 발이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구두를 맞춰 신기에 내 옷은 죄다 캐주얼했다. 


 대학생이 되어 고향을 떠난 나는 아주 가끔씩 본가에 들렀다. 오랜만에 읍내 사거리에 갔더니 솥뚜껑 삽겹살 집은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도 삼겹살을 먹을 때면, 지난한 나의 노동을 떠올릴 때만 하필 솥뚜껑이 생각난다. 그 많던 솥뚜껑들은 뭐하고 있을까. 누군가가 던진 솥뚜껑이 지구를 지나 우주를 날아다니는 건 아닐까 생각하면 웃음이 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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