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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꿀 Feb 01. 2023

돈 안 줄 거면 시키지 말어~

여덟 살의 아르바이트


흰머리 하나에 50원

노동’에 관한 나의 역사는 꽤 길다. 잔잔바리 심부름을 제외하고 최초의 아르바이트는 ‘흰머리 뽑기’가 아니었나 싶다. 때는 바야흐로 초등학교 1~2학년 시절. 당시 엄마 나이는 마흔.

세상에! 지금 나랑 나이가 같네! 셈했다가 깜짝 놀랐다. 나는 우리 집의 셋째였는데, 내 위로 언니와 오빠가, 아래로는 남동생이 있었다. 엄마는 당시 동네에서 소문난 ‘노산러’였다. 남동생을 37살에 낳았을 뿐인데 “막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할머니 되겠네. 어쩌나~.는 걱정을, 어린 내 귀에도 딱지가 붙을만큼 들었다.(그때 엄마 기분은 어땠을까? 시간이 되면 인터뷰 해봐야지.)


엄마 머리에 언제부터 흰머리가 났을까. 당시, 꽤나 효녀였던 나는 엄마 아빠의 건강을 염려하곤 했다. 엄마는 수시로 “아! 홧병!” 외치며 머리를 싸매었고, 아빠는 간이 좋지 않아 젊은 나이에 ‘간경화’라는 병을 얻었다. 얼마나 내가 조숙했냐면, 방학을 맞아 도서관에서 열리는 ‘여름독서교실’에 참가했는데 집에 올 적마다 <자연으로 치유하기, 간경화증> 같은 책을 빌려오곤 했다.(안타깝게도 아빠는 내가 대학생 때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스킨십’을 좋아했다. 내가 엄마의 머리카락과 얼굴을 만지면 그렇게도 좋다고 했다. 아마, 그때부터 나의 스킬은 발전했을 것이다. 바로바로... 뾰루지 짜기 기술! 얼굴에 뭐가 나면 짜지 않고는 못 기는 고얀 기술 말이다(이래서 내 얼굴에 잡티가 많은 거군요).

엄마 머리에서 흰 머리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검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작은 손으로 하나하나 헤치다보면 투명하게 은빛이 나는 흰 머리가 보였다. 엄마는 대가가 정확한 사람이었다. 흰 머리를 하나 뽑을 때마다 나에게 값을 치러주었으니까. 얼마였을까? 아마, 흰 머리카락 하나에 50원을 받았던 것 같다. 엄마 머리에 흰머리가 많지 않았으니 아무리 뽑아도 천 원을 벌기 힘들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며 돈벌이가 점점 쏠쏠해지는데...(말잇못) 아아, 나는 엄마의 늙음을 먹고 돈을 벌었구나. 엄마가 염색을 하기 까지 나의 ‘흰머리 뽑기’ 아르바이트는 계속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흰머리 뽑기’는 아르바이트라기 보단 ‘데이트’ 같았단 생각이 든다. 한갓지게 거실에 누워 젊은 엄마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만지고 쓰다듬는 여덟 살의 나. 타임머신이 있다면 당시의 그때로 돌아가서 그 풍경을 가만가만 지켜보고 싶다. 문득 어릴 적 살았던 전셋집의 바람 잘 들던 툇마루가 떠오른다.




노동의 대가 ‘토마토 한 박스’

초등학교 2~3학년 무렵. 주말을 맞아 친구들과 경숙이네 토마토 농장에 일손을 거들러 갔다. 얼마나 일손이 부족했으면 아홉 살 안팎의 아이들 손까지 필요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내가 살던 마을은 주업이 ‘어업’ ‘농업’인 시골마을이었다. 바닷가 동네는 상가가 몰려 있는 비교적 시내였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끊임없이 밭이 펼쳐진 작은 동네들이 이어졌는데 거기 어딘가에 토마토 농장이 있었다.


당시 내 친구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밭일을 돕곤 했다. 친구들이 근육통을 호소하면 ‘아, 농번기가 되었구나’ 느낌이 왔으니 말 다했다. ‘어업’에 종사했던 우리 부모는 아무리 일손이 부족해도 우리를 동원하지 못했다. 아이들이 배를 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밭일은 아무리 고사리 손이어도 쓸 데가 있었다. 잡초 하나 뽑는 일에도 노동력이 필요했으니 얼마나 귀했을까.


이른 아침, 토마토 농장에 도착했다. 저 멀리 비닐하우스 안에 새빨간 토마토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게 보였다. 어찌나 예쁘던지, 바라만 보아도 기분이 좋았다. 예쁜 토마토를 딸 생각을 하니 설렜던 것도 같다.


하지만, 낭만은 오래가지 않았으니... 답답한 비닐하우스 안에서 하루 종일 토마토를 따려니, 내 몸이 뻘겋게 익어가는 것 같았다. 다리가 아팠다. 팔도 아팠다. 힘들었다. 쫑알쫑알 수다 떨며 일하던 나와 친구들은 곧 말을 잃고 말았다. 어서 따서 집에 가자! 이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도대체 왜! 토마토는 아직도 나무에 열려 있는 것일까! 하나를 따면 두 개가 생기는 신종 농사 기술이 생겨난 게 아닐까?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에!

그날, 적어도 10시간 넘게 일한 것 같다. 아침,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농장에 도착했는데 집에 갈 때는 해가 져서 깜깜했으니까. 일을 마치자 우리 앞에는 토마토 수십 박스가 놓여 있었다. 뿌듯했냐고? 솔직히,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농사 일이 보통이 아니라는, 정말 힘들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여기, 수고했으니 주는 거야.”
사장님, 그러니까 경숙이의 엄마는 우리에게 품삯이라며 토마토 한 박스를 주었다. 어린 마음에도 이게 뭔가 싶었다. 물론 농사꾼에게 직접 농사지은 농산물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안다. 그렇지만 어린 마음에 열심히 일한 대가로 용돈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하고 싶은 것도, 사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었으니까.

저녁, 토마토 한 박스를 들고 집으로 들어서자 엄마가 입을 떡 벌리며 한 소리했다.
“아이고, 하루 종일 고생했는데 이게 뭐야?”

한 박스를 어떻게 요리해 먹었더라?

엄마의 이 말은 내 기분이 왜 이렇게 석연치 않은지 깨닫게 했다. 그래, 나는 용돈을 벌 거라 기대했던 거다. 내가 딴 토마토를 삯으로 받을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엄마는 내가 작은 심부름이라도 하면 꼭꼭 용돈을 쥐어줬다. 슈퍼에 다녀오거나 장을 보고 오면 잔돈으로 받은 동전은 손에 쥐어줬고, 흰 머리를 많이 뽑은 날에는 보너스까지 줬다. 엄마는 아무리 어린 아이여도 노동의 삯을 치러야 함을 늘 보여주었다.




 안줄 거면 시키지 말어~

하지만, 엄마의 딸은 안타깝게도 그다지 야무지게 크지 못했다. 성장하면서 숱한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돈을 떼먹히거나 ‘재능 기부’를 명목으로 호구 짓을 한 적도 많다. 농산품 브랜드의 캘리그라피를 써주고 페이를 못 받은 경험, 일일 책방지기를 하고서 페이 대신 화장품을 받은 경험(자기가 안 쓰던 것) 등등. 좋은 마음으로 해주었는데 마음이 상했다. 그제야 알았다. 나는 대가로 ‘돈’을 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 마음을 숨기며 점잖은 척 했던 것 뿐이었다.


아직도 한국인의 정서에는 ‘돈’이야기를 하면 상스럽다는 인식이 있는 듯 하다. 프리랜서로 외주 일을 맡거나 강연 의뢰를 받을 때 정확한 ‘페이’를 말해주지 않는 이들이 있다. 대놓고 페이를 말하는 게 겸언쩍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자신이 없는 건지 속마음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연락을 받는 프리랜서 입장에서는 정확한 게 좋다.


고백하자면 나는 아직도 여전히 페이를 묻는 게 어렵다. “얼마 주나요?” 묻는 게 어쩐지 ‘너무 돈을 밝히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 꾹 참고 넘어간 적도 다. 너무 깐깐하게 굴었다가 다음에는 일을 안 줄까봐 침묵을 택한 적도 많다. 그리고 결과는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누군가는 적당한 페이를 챙겨줬지만 누군가는 말도 안 되는 금액에 내 노동력을 후려친 적도 있다. 그때 가서 불평을 하고 문제를 제기해봤자 너무 늦은 일이다. 처음부터 정확한 페이를 논의하고, 협의하는 게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일하는 가장 깔끔한 방법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그렇기에 요즘의 나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정중하게 묻는다.


“페이는 얼마인가요?”

(속마음: 돈 안 줄거면 시키지 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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