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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련 Jul 26. 2022

내가 쓴 어쩔 수 없는 시나리오

백수가 된 시절

수련 씨, 일 잘하고 똑부러지는 건 맞는데 이 상황에서는 완전 헛똑똑이네, 이거.


올해 3월에서 4월이 넘어가는 일주일을 생각하면 ‘이 상황’ 때문에 여전히 헛구역질이 난다. 나를 아껴줬던 상사가 전화로 내게 한 말은 가슴 중간이 얻어 터진 것처럼 아팠다. 나만 괜찮다고 하면 모두가 괜찮아지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나는 “알겠어요, 괜찮아요.” 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럴 수 없었다. 용납되지 않았다.



*

"......"


억울한 표정을 짓는 그 사람을 마주보며 뱉고 싶은 말을 삼켰다. 맘 같아서는 욕을 한트럭 쏟아주고 싶었지만,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전날 새벽까지 메모장에 써 외웠던 대사를 천천히 내뱉었다. 


“저는 팀장 포지션과 그에 따른 역할, 그리고 커리어 성장에 기대를 하고 왔어요. 제 자식처럼 여겼던 서비스도 론칭이 코앞이었지만, 그런 이유로 이 회사로 이직을 하기로 마음 먹었던 거예요. 그런데 제가 팀에서 가장 막내고, 이미 다른 분들이 있고, 왜 아무도 그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안 해주시나요.”


그는 사과를 했고, 해결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무시해서가 아니라 내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 이해하는 줄 알았고, 다른 사람 같았으면 이 상황을 그냥 넘길 수 있지만 본인은 해결하려고 하지 않냐며. 바짝 마른 입술로 무어라 얘기하는데 내 안에서는 들끓는 분노가 분출됐다. 


“저 오늘부터 업무에서 일주일 동안 손 떼겠습니다. 해결책 마련해주시고, 연락주세요.”


*

“내가 네게 팀장 제안을 했었니? 내가 기억이 안 나는 걸까? 그리고 설사 그랬더라도, 너는 입사하자마자 말을 했어야지 왜 이제야 말을 하니?”


통화 녹음이 안 되기에 아이패드의 녹음기를 켜고, 또 다른 이의 말을 들으며 정신이 아찔했다. 와! 이렇게 뻔뻔할 수가! 내게 팀원도 2명 데려와서 팀 꾸리자고 했잖아! 오! 그렇군! 와! 나 이제 어떻게 하지?


팀장인 직책 빼고는 다 같은 상황, 그리고 입사 후 한달 정도나 지나 이렇게 팡 터뜨려버리는 상황에 내가 몇 주 고민하고 준비한 문제의 본질이 덮였다. 난 그저 그들에게는 무단결근을 하고, 팀장에 목마른 애가 됐어버렸다.


*

이 일을 소개시켜준 사람과 나를 아껴주는 상사는 일주일 동안 매일 2통 이상 내게 전화를 걸었다. 특수성이 있는 일이라 그들에겐 내가 간절하다는 것과 소개해준 건데 이런 상황이 발생된 것에 미안하고 안타까워했다. 난 그들이 중간에서 회사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게 너무 괴로웠다. 내가 커뮤니케이션을 잘못했다는 것, 소위 말하자면 급발진한 게 큰 문제가 되었으니 그걸 인정하는 게 필요하다고.


그땐 결혼을 앞뒀고, 모두 말로 나를 탓하고,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불안한 문제들이 뒤섞여 일상이 마비된 상태였다. 그런 꼴로 제대로 된 생각이 불가능했다.


“이건 수련 씨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시나리오를 쓴 거예요. 괜찮아요.
우리는 공격에 취약한 사람들이잖아요.
긴장하면서 열심히 일을 잘하고,
내 포지션을 정확하게 다지면 다른 것은 되겠지 여겨서
다른 부분에서 미숙한 거죠.
정확한 방어와 정확한 공격에서 미숙한 거예요.
그러면서 벌어진 일인 거야. 괜찮아.”


폭풍 같던 날들이 이야기했더니 상담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그때 나는 상사가 내게 말했던 ‘헛똑똑이’가 무엇인지 단번에 이해가 됐다.


올봄에 일어난 일을 돌이켜보면, 단지 그때 그 문제만으로 발생된 건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내게는 꽤 긴 시간 동안 무언가가 잔뜩 쌓여있었고, 이제 내 몸과 정신이 그걸 받아들일 수 없을 때 하필 그 일이 내게 벌어진 거라고. 그때 “괜찮아요.” 라고 했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까. 그런 if가 종종 나를 스쳐가곤 하지만, 과거와 미래의 나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이 일로 나는 지금 백수다. 쉬면서 2개월은 결혼준비로 정신이 없었고, 이제야 2개월 동안 충전을 하고 있다. 그때 1% 간당간당한 배터리를 가졌었다면, 지금은 한 30% 정도 충전이 된 것 같다. 일주일에 2-3번 정도 필라테스를 하고, 동네를 걷고, 카페에 가서 글도 쓰고, 읽고픈 책을 잔뜩 주문시켜 독서를 하고, 완벽하지 않지만 생각한 모임을 운영하고, 지난 날들을 하나씩 들춰보며 반성을 하고, 많이 놀랐을 나를 이제야 꽉 안아주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구두로 협의하는 내용은 증거를 만들 것

문제를 쌓아두지 말 것

내 이야기를 제대로 전하는 것에서 끝이 아님을 알 것

내 속을 가끔 환기시켜 줄 것 

자책하지 말 것

탓하지 말 것

잘 먹고 잘 살 것


가끔은 정신이 얼얼해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누군가는 쓰라린 일들을 배움이라고 말하는데, 누군가에겐 골절된 만큼 타격이 큰 폭력에서 끝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난 회복하면서 이 문제에서 배워가겠지. 더 괜찮은 내가 되겠지.


덜 아프게 크고 싶었는데, 내가 쓴 시나리오에서는 덜 아픈 성장은 없는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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