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식 Nov 08. 2019

달건이

③편입니다.

달건이 ①편 보기

달건이 ②편 보기


걱정과는 달리 달건이가 우리 집 덱을 장악하고 사료를 독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동네 길고양이들은 대체로 통통한 편이다. 잘 먹고 다닌다는 것이고 우리 말고도 먹이를 주는 곳이 꽤 있단 뜻이다. 그래서인지 사료를 놓고 싸우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달건이 못지 않게 자주 출몰하는 스노우가 가끔 자기 밥그릇 놔두고 굳이 다른 고양이가 밥 먹는 곳에 가서 훼방을 놓긴 하지만, 장난이지 먹이 싸움은 아니었다. 고양이 대부분은 평온하게 제 배 고플 때 와서 조용히 먹고 갔다. 달건이 말고 덱에 퍼질러 누워 자는 놈도 없었다.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이 지나면서 고양이들 얼굴도 조금씩 구분이 됐다. 얼굴에 얼룩이 있는 녀석, 각각 다른 줄무늬 모양, 눈이 동그란 놈, 작은 놈... 그 중 몇은 나와 마주쳐도 멀리 달아나지 않고 밥 주기를 기다렸다. 애교 많은 스노우는 두세 걸음, 원조는 다섯 걸음 정도를 안전거리로 유지했다. 그렇게 거리가 좁혀지자 녀석들에게 가는 내 마음도 달라지는 걸 알 수 있었다. 달건이도 그랬다. 워낙 움직임 자체가 느렸고, 만사 귀찮은지 멀리 도망가지도 않았다. 달건이 얼굴도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었는데, 어랏, 자세히 보니 달건이는 애꾸가 아니었다. 오른쪽 눈이 특이하게 작을 뿐이었다. 착각했다. 미안하다.  


그렇다고 달건이가 갑자기 예쁜 고양이가 된 건 물론 아니다. 안 예쁜 고양이도 흔치 않지만, 눈이 저렇게 짝짝인 놈도 흔치 않을 것이다.


어쨌든 달건이는 우리 집 덱의 임차 고양이가 됐다. 낮에 집에 없으니 이 녀석이 언제 왔다 언제 가는지 모르지만, 저녁에도 오고 휴일에는 아침 저녁으로 와서 먹고 쉬고 자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묘한 것이 자꾸 보면 정이 들게 마련이다. 녀석에게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한동안 안 보이면 어디서 뭐하나 싶기도 하고, 한 이틀 못 보면 무슨 일이 생겼나, 나이도 많은 것이 어디서 기력을 잃고 쓰러진 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도 들었다. 나도 늙어가는 신세다 보니 동병상련이 생긴 것일까? 게다가 다른 고양이들과는 달리 이 녀석은 덱 여기저기서 잠을 자는데, 온 몸에 긴장을 풀고 아예 축 늘어져 잔다. 편안해 보인다. 내 집을 저리 편안히 여기는데 굳이 그런 놈을 미워할 이유는 없다 싶고, 이런저런 상황들이 겹치다 보니 '더러운 첫 인상'이었던 달건이의 얼굴도 달리 보였다. 자세히 보니 남자 얼굴로(달건이는 수컷이다) 저만하면 뭐 나쁘지 않다 싶었다. 우리 동네 고양이들 중에 가장 '호랑이 포스'를 가진 것 같기도 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풀꽃 - 나태주)


물론 이 건 좀 오버다. '예쁘다'나 '사랑스럽다'는 달건이에게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다.  


'달건'은 짐작하시다시피 '건달'을 거꾸로 한 것이다. 첫 인상이 깡패였으니까. 정이 좀 들고 나니 '달건'은 좀 심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슬렁어슬렁 다니는 모습, 인상 찌푸린 저 얼굴을 보면 이름은 잘 지었지 싶다. 예쁘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은데 볼수록 정은 더 들었다.


결정적으로, 녀석은 밥을 두고 어린 것들과 다투지 않는다. 덩치 작은 녀석들이 먹고 있는 밥을 뺏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밥 먹을 때 다른 녀석들이 오면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준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사료 그릇을 2개로 늘렸더니 우르르 여러 놈이 몰려왔고, 이번에도 역시 달건이는 '아이들'에게 양보했다. (사료통에 코 박고 있는 녀석이 스노우다. 원근감 때문에 둘 크기가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달건이가 훨씬 크다.)


이 때문에 달건이의 호감도가 급상승했다. 이 녀석 알고 보니 양반이잖아. 아닌가? 달건이가 이 녀석들의 아비인가? 아니면 할아버지? 어쨌든 '덩치 좋고 사납고 더러운 인상'의 달건이는 당초 우려와는 달리 양보의 아이콘으로 이미지를 재정립했다.


한 달쯤 지날 무렵 달건이는 마침내 우리 집 터줏대감으로 자리를 잡았다. 왜 아니겠는가? 덱을 제 집 삼아 퍼져 자고 있는 녀석인데. 이른 아침부터 밥상 앞에서 집사 오기를 기다리는 녀석인데. 물론 표정은 변함없는 무뚝뚝이다. 터줏대감님이 겨울 되면 추울까봐 포장박스를 개조해 집을 만들어줬더니 슬그머니 들어가 앉아 있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덩치에 비해 집이 작았던지 그 이후 박스 집은 스노우 차지가 되고 말았다.)


지위가 달라지니 대우도 달라졌다. 회를 살 때 고양이 몫으로, 아니 달건이 몫으로 조금 더 넉넉히 샀고 고양이 캔과 핥아 먹는 간식 츄르도 주문했다. 실컷 특식을 내줬는데 다른 고양이들한테 양보하는 모습을 보곤 아예 달건이만 있을 때 얼른 삼겹살 몇 점을 구워 주기도 했다. 어쩌면 양보한 게 아니고 젊은 것들에 밀려난 것일 지도 모르겠다는 안쓰러움 때문이다.


녀석과의 거리는 짧게는 두 발짝으로 줄어들었다. 물론 제 마음대로다. 안전거리는 녀석의 상태에 따라 조금씩 늘어났다 줄었다 한다. 표정은 늘 뚱하다. 도대체 이 놈 어디가 마음에 드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른 아침 덱으로 나갔을 때 달건이와 스노우가 함께 집사를 기다리고 있을 때가 가끔 있다. 밤새 여기저기 쏘다녔으니 아침이면 배가 고플 것이다. 스노우는 "야옹, 야옹" 하면서 애교를 떤다. 안 예쁠 수가 없다. 달건이는 무뚝뚝하다. 뭘 했는지 눈꼽까지 껴서 나타날 때도 있는데 정말 못 났다 싶다. 그래도 좋다.


귀엽고 예쁜 고양이들은 그냥 귀엽고 예쁜데, 달건이는 뭔가 철학적이다. 은퇴한 제왕? 아, 이 것도 오버다. 일선에서 물러난 마을 이장 정도가 적절한 비유일 것 같다. 나같은 중늙은이와 대화가 될 것 같은 느낌? 그래서인지 아내는 퇴근 후 달건이에게 사료를 주면서 밖에서 있었던 힘든 얘기들을 나눈다고 한다. 왠지 이해가 된다.


몇 살인지 모르지만 늙긴 했으니 달건이가 앞으로 얼마나 우리와 인연을 맺을 진 알 수 없다. 살가운 놈이 아니라서 내가 아무리 잘 해 줘도 곁을 내주거나 애교를 떨 일은 없을 것 같다. 뭐 그래도 된다. 적당한 거리, 적절히 제 자리에 있기만 해도 충분하다.


동이 틀 무렵 고양이들 아침상 차리러 사료를 들고 나갔더니 달건이가 묵묵히 앉아 있다. 집사가 늦게 와도 채근하는 법이 없다. 마침 자기를 주제로 글을 쓸 생각이어서 말을 붙여 봤다. 저 뚱한 표정엔 변화가 없고 절대로 입을 여는 법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눈빛으로 제법 대화가 된다.

- 너를 주제로 글을 쓰는데, 괜찮겠어?

= 뭐... 쓰던지.

- 잘 먹고 잘 지내? 사는 건 어때?

= 그럭저럭.

- 난 어떨 땐 좀 힘들고 그렇던데.

= 다들 그렇지.

- 느릿느릿, 터벅터벅 다니는 건 왜?

= 급할 땐 나도 뛰어.

- 늘 뚱한데?

= 원래 그래.

- 내가 나이도 많은 것 같은데, 너도 말을 놓네?

= 내 캐릭터야.

- ...

= 배고프다. 집사, 들어가라.

- 알았다. 사진이나 한 장 찍자.

= 찍든지.


아침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사진을 찍고 보니 우리 달건이 잘 생긴 것 같기도 하다. 짜아식. (끝)


<부록> 

세상 꿀잠
스노우 - "야옹~"으로 귀염 독차지
동글이 - 가장 어리고 겁이 많다.
앞에 원조, 뒤에 스노우 - 원조 주특기는 스노우 괴롭히기. 알고 보니 이 놈이 깡패다.









작가의 이전글 달건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