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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식 Dec 13. 2019

달건이, 달곤이, 달손이

고양이들마다 영역이 있어 그 영역을 잘 벗어나지 않고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고 한다. 직접 겪어본 적이 없지만, 집에 오는 길고양이들을 보면 대부분 일정한 방향에서 오간다. 스노우는 왼쪽에서, 원조는 오른쪽에서 주로 오고, 원조는 오른쪽 앞집 마당에서, 스노우는 우리집 왼쪽 텃밭 쪽에서 자주 보인다. 우리집 방문객들 중 포스로는 으뜸인 달건이의 경우 좀처럼 눈에 띄지 않지만, 집 뒤 쪽 산 주변에서 자주 보인다. 아마 산과 동네 주차장이 주무대인 듯하다.


어느날 차를 타고 산 쪽을 지나는데, 달건이 비슷한 녀석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차를 세우고 창을 열고 "달건아" 하고 불렀는데, 녀석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달건이는 내가 부르면 뚱하고 귀찮은 표정으로 힐끗 보고 마는데, 이 녀석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보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달건이보다 덩치도 좀 작고 움직임도 빨랐다. 달건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이 녀석이 우리 집으로 와서 식사를 하는 바람에 정체가 밝혀졌다. 덩치는 달건이의 4분의 3 정도, 양 쪽 눈은 찌그러지지 않은 달건이의 왼쪽 눈과 똑같은 녀석이었다. 그래서 이 친구는 '달곤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달건이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줄여서 '고니'라고 부른다.


달건이와 고니가 한 자리에 있는 걸 본 적은 없으니 각자의 사진으로 두 녀석을 소개한다.


고니를 보니 우리집 대표 못난이 달건이도 젊었을 땐 한 인물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떠신가? 오른쪽 고니는 인물이 제법 준수하지 않은가!


달건이 이야기를 브런치에 썼더니 (달건이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여기로) 동네 친한 형이 "우리 집에도 달건이가 가끔 온다."라는 증언을 하셨는데, 품위를 최고로 중시하는 달건이의 속성상 이집저집을 쏘다니지는 않을 것 같고, 아무래도 달곤이를 보고 달건이로 착각하신 게 아닌가 싶다. 고니는 달건이와 달리 젊음을 발산하며 잘 뛰어다니고 인상도 훨씬 순한 편이다. 그러나 꼭 뛰어야 할 일이 아닐 때는 터벅터벅 걷는다. 내가 이 놈을 달건이라고 착각한 이유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다. 아쉽게도 그 이후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하는 고니를 다시 본 적은 없다.


대신, 달손이가 나타났다. 고니가 딱 한 번 모습을 보이고 사라진 지 8일 뒤, 달건이-달곤이의 혈통을 이은 게 틀림없어 보이는, 얼굴이 아주 작은, 그렇지만 한 눈에도 못 난 아기 고양이가 살금살금 우리 마당으로 기어들어왔다.


우리집 덱은 '회장님'이라는 별명까지 따로 얻은 달건이가 가끔 얼굴을 내비칠 뿐 대부분은 스노우와 그 친구들이 차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스노우의 영역인데, 거기에 처음 이 녀석이 나타난 것이다. 다행히 스노우와 친구들이 자리를 비웠을 때라, 별 탈 없이 사료를 먹고 갈 수 있었다.


이 녀석은 처음부터 특이했다. 지금껏 나와 가장 가까웠던 고양이는 스노우였는데, 늘 한 발짝까지만 접근을 허용했다. 그러나 이 작은 놈은 처음부터 야옹야옹 거리면서 나 뿐 아니라 우리 식구 누구에게나 달라 붙었고 고양이 간식 츄르를 짜서 주면 날름날름 받아먹기까지 하는 애교를 부렸다. 이렇게까지 곰살맞게 구는데 이름을 지어주지 않을 도리는 없다. 달건이-달곤이의 뒤를 잇는 달손이(달건이의 손주)가 된 것이다.


달손이의 약칭은 소니가 됐다. (요즘 연일 상한가를 치고 있는 손흥민과 팬들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달리 부를 수도 없지 않은가!) 소니가 처음 나타난 날은 11월 초순, 꽤 추워지기 시작한 때다. 소니는 약간 마른 아기 고양이였다.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직 자기 영역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 해 여기저기 다니다가 우리 집으로 온 걸로 짐작된다. 문제는 터줏대감 스노우였다.

둘이 잘 지내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스노우는 소니를 '친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니와 비슷한 크기의 아기 고양이 동글이가 스노우 따라다니며 잘 얻어먹고 다니기에 기대를 좀 했건만, 스노우와 일당은 소니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소니가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주로 밥 먹을 때만 나타나는 스노우는, 주로 종일 집에 있는 소니를 볼 때마다 괴롭혔다. 소니가 몸을 피해 나무 밑 자기만의 아지트로 달아나도 거기까지 쫓아가서 협박을 해댔다. 소니의 비명소리가 들려 황급히 나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스노우 뿐 아니라 순하게 생겨 수니(순희)로 불리는 녀석도 괴롭힘 대열에 합류했다. 더더욱 놀라운 건 달건이였다. 소니의 할아버지가 분명해 보이는 녀석인데, 소니를 보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서운 표정을 하고 소니 쪽으로 걸음을 성큼성큼 옮긴다. 소니는 그야말로 사색이 되어서 구석으로 파고 들다가 "끼야아옹~" 하면서 구조를 요청한다. 야생 고양이들 사이에 혈연은 지연, 즉 구역에 아무런 영향을 못 미치는 모양이다. 달건이에게 달손이는 그저 영역을 침범한 어린 놈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온갖 핍박에도 불구하고 소니는 꿋꿋하게 버텼다. 비명 소리가 들리면 얼른 나와주는 집주인의 도움도 있었겠지만, 스노우 일당이 돌아가며 괴롭혀도 집을 떠나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건 고양이들이 소니를 때리지는 않는 것 같았다.) 애처로운 얼굴로, 소니는 스노우 일당이 지배하는 왼쪽 덱 근처로는 얼씬도 않고 우리 식구들이 드나드는 오른쪽 덱에 자리를 잡고 앉아 집 주인들을 설득하는 전략을 택했다. 날이 추울 땐 '집으로 들어가면 안 되요?' 하는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아예 밀고 들어오기까지 했다.


소니를 아예 집에 들일까? 식구들의 고민이 시작됐다. 술 한 잔 한 날에는 '들이자'는 결론이 나왔고, 다음날 아침에는 '아냐, 아직은...'이라는 쪽으로 결론이 바뀌었다. 며칠의 고심 끝에 내린 최종 의견은 아직 우리가 집사로서 준비가 안 돼 있다는 것. 소니가 뛰어다니기엔 집안 곳곳에 떨어져서 깨지면 안 되는 물건이 많았고, 우리 식구들의 여행 계획도 너무 많았다. 해서 일단은 소니가 기거할 수 있는 작은 집을 지어주기로 했다. 스노우 집이 두 채나 있었으나 그 근처엔 얼씬도 안 하는 바람에 새로 집을 지어야 했다. 집은 스노우와 친구들의 주무대가 아닌 오른쪽 덱에, 아예 입구도 스노우 일당이 안 보이는 쪽으로 놔 줬다. 하루이틀 새 집의 냄새를 맡고 간을 보던 소니는 다행히 집안으로 들어갔다.


사람 마음이 묘해서, 스노우가 소니를 괴롭히면 그 귀엽던 스노우가 슬슬 미워지기까지 했다. 소니의 비명 소리가 들리면 나나 아들이 후다닥 뛰어나가 말리기를 몇 차례, 말귀를 못 알아듣는 스노우는 결국 우리 부자에게 쫓겨나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물론 그런다고 포기할 놈은 아니다. 스노우는 지금도 우리가 없을 때 꾸준하게 나타나서 소니를 협박하고 사라진다. 이럴 경우 소니는 한동안 꼼짝도 않고 집안에만 처박혀 있기 때문에 안 봐도 놈들이 왔다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결국은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


거의 한 달 가까운 괴롭힘을 버틴 끝에 소니는 우리집 오른쪽 덱을 차지하게 됐다. 다른 고양이들이 안 올 때는 왼쪽 덱을 포함해 집안 이곳저곳을 슬금슬금 순찰하기도 한다. 에어콘 실외기와 자기 집 지붕이 낮 시간 소니의 편안한 휴식처이고, 집 앞 소나무는 소니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터다. 한 달 새 가늘었던 목도 제법 두꺼워졌고 시름시름 아파보이던 기색도 사라졌으며, 아기 고양이었던 얼굴도 제법 청소년 고양이로 틀을 갖춰 가고 있다. 버티고 버텨서 소니가 마침내 '우리집 고양이'가 된 것이다. 그 사이 스노우 집은 사라졌고(이 녀석의 체류 시간이 길면 길수록 소니를 괴롭히는 시간도 길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은 집에서 잠도 잘 안 잤다.) 소니의 집은 보수 공사를 통해 더 튼튼해졌다.


굶주리고 아픈 상태에서 우리집을 찾았고, 내 다리를 툭툭 들이받으며 왔다갔다 하고(head bunting이라고, 집주인의 몸에 자기 냄새를 묻히는 행위라고 한다.) 발라당 누워 애교까지 부리는 놈이라 소니에게 마음이 안 갈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약은 스노우 녀석이 가끔 슬픈 표정을 짓는게 마음 아프긴 하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근데 그 영화에서도 사랑은 결국 변하지 않았던가?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주기 시작한 지 석 달도 안 돼서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앞으로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추세로 간다면 결국은 달손이의 승리가 예상된다.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소니 이 녀석은 암놈인 것 같은데... 아이고, 그 다음은 상상하기도 싫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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