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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식 Apr 23. 2018

책 내용보다 글 솜씨

<독서일기: 승려와 수수께끼> - 랜디 코미사

   얼마 전 갑자기 양자역학에 꽂혀서 책 두 권을 샀다. 한 권은 어렵기만 한 과학을 나와 같은 '문송', '과알못'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쓰신다는 국내 유명 과학자의 양자역학 해설서이다. 다른 한 권은 스웨덴 출신의 맥스 테그마크가 쓴 <유니버스>다. 결론적으로, 두 책 모두 끝까지 읽지 못 했다. 저자들은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해 양자역학을 설명했으나, 열심히 따라가다 어느 단계에서 길을 놓친 이후로는 흥미를 잃고 말았다.


   책을 읽고 나서(아니 읽다가 말고) 느낀 것은 두 가지. 첫 번 째는 과거 상대성이론을 읽을 때 그랬던 것처럼 '내게 지나친 과학은 역시 무리'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두 번 째는 역시 국내 글쟁이보다는 해외 글쟁이들이 글을 더 잘 쓴다는 것이다. (양자역학 쉽게 풀어 쓰느라 정말 고생하신 국내 과학자 김 모 교수님을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저 일반론일 뿐이다. 이 얘기는 다른 기회에 상세히 하겠다.)



   <승려와 수수께끼>를 읽고 나서 딱 든 생각이 그렇다. 참으로 글 쓰는 훈련을 잘 받았구나. 저자는 좋은 글을 많이 읽었구나. 문학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평생을 변호사로 투자 전문가로 활동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글의 구조를 짜고 고비마다 적절한 표현과 비유를 사용할까.


    서문부터 다르다. 저자는 오토바이를 타고 미얀마를 고행하듯 여행하던 길에 한 승려를 만난다. 우연과 필연이 겹친 듯 묘한 인연으로 승려를 태우고 먼 길을 동행하게 되고, 종착점에서 만난 한 고승으로부터는 묘한 수수께끼를 화두로 받게 된다. "달걀을 1미터 정도 아래로 떨어뜨리되 깨뜨리면 안 됩니다. 어찌 해야 할까요?"


   알쏭달쏭한 숙제를 안게 된 저자는 다시 승려를 태우고 왔던 길을 다시 달린다. 왜 이 길을 가야 하는지는 모른다. 원인과 결과가 일치하지 않으며 다소 몽환적이고 신비하기까지 한 미얀마의 길을 그저 달리고 달리던 순간, "수수께끼의 해답이 떠올랐다."


   여기까지가 서문이다. 자, 귀하가 독자라면 이 책을 더 읽고 싶지 않겠는가? 나는 바로 본문으로 들어가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릴 정도였다. 그리고 시작되는 본문의 첫 문장은 또 이렇다.


   "재미있는 장례식 문화를 만들려고 합니다." 면담은 그 발언과 함께 시작됐다.


   책의 얼개는 funerals.com이라는 사이트를 만들어 인터넷 사업을 하고자 하는 한 청년을 만나고, 그의 고민과 문제점, 해결방안 등을 저자 본인의 경험담에 섞어 가며 풀어내는 방식이다. 스타트업을 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실리콘밸리에서 투자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뤄지는지, 투자를 결정하는 벤처 캐피털리스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등등을 사실감 있고 재미있게 전해준다.


   그러나 내게는 정작 저자가 전달하고 싶어하는 메시지들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열정과 본질, 사업의 핵심, 변화 등에 관한 얘기들은 스타트업과 실리콘밸리, 벤처기업가에 관한 다른 책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비슷한 책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기도 하고, 서문에서 받은 글 잘 쓰는 변호사에 대한 호기심이 컸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다음 챕터는 어떤 방식으로 풀어갈까?'하는 궁금함이 저자가 어떤 내용을 이야기할까를 압도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저자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플롯을 잘 유지해간다.


   스타트업을 하고 있거나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매우 도움이 될만한 책으로 보인다. 내가 아는, 스타트업 인큐베이팅을 하시는 한 분이 그렇다고 했으니 그럴 것이다. (관련 서평은 https://brunch.co.kr/@jisundream/107) 저자가 단순하지만 잘 짜여진 구조를 유지하며 시종일관 본인의 이야기를 풀어가기 때문에 읽기도 매우 편하다. 딱 하나 아쉬운 건, 수수께끼다.


   "달걀을 1미터 정도 아래로 떨어뜨리되 깨뜨리면 안 됩니다. 어찌 해야 할까요?"


   책 말미에 수수께끼의 답을 적어 놓긴 했지만, 내게 오히려 다른 질문이 남았다. "그래서, 뭐?"

   (수수께끼와 책 주제의 연결고리가 약한 게 몹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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