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태지역 정보통신 협의체인 APT라는 지역기구에서 내가 담당하고 있던 한 그룹에서 회의 관련 규정을 제정할 필요가 생겨 이런 저런 규정 초안을 준비해서 논의를 한참 하던 중이었다. 당시 나는 40대 초반으로 아태지역 기구인 APT뿐만 아니라 국제 기구인 ITU 등에서 이런 저런 소그룹 의장을 맡아서 이름 석자도 좀 알려지고 뭔가 국제회의에서 영향력도 쪼끔 생겼다고 신나 있을 때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 분으로서 APT 사무총장으로 계시던 고 이종순 총장님께서 커피브렉이 되자, 나에게 '규정을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든 경우를 다 적용할 수 있는 규정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규정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수시로 발생하므로 원칙적인 수준의 규정을 만든 후 이를 잘 적용하는 덕과 지혜가 더 중요하다'라고 말씀하셨다.
젊은 혈기와 의욕, 열정 등으로 잘 무장되어 있던 나에게 선배님의 말씀은 햇볕에 봄 눈이 녹 듯 그 이후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 처리 방식이 되었다.
아직도 미국, 유럽 등과 논의를 할 때 이런 방식을 적용하기에는 서로 살아온 문화와 역사적 배경이 달라 어려움이 있으나, ITU에는 'Australian Approach'이라고 하는 전통이 있으며 이는 논쟁이 되는 문장을 제거 함으로써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자는 것인데, 고 이종순 총장님의 지혜와 통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그네의 옷은 따스한 햇볕이 벗기는 것이지 강한 바람이 벗기는 게 아니라는 이솝의 이야기를 왜 항상 잊고 사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