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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규진 Sep 30. 2015

기 싸움

Evolved와 Evolving

1998년 ITU의 3G 준비 회의는 유럽의 기술과 미국의 기술을 하나의 표준으로 만들어 가기 보다는 복수 표준으로 만들어 시장의 선택에 맡기자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으며, 일본은 독자적으로  개발하였던 2G 시스템의 세계화에 어려움을 경험하곤 3G는 유럽과 공조하여 세계 시장을 확보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당시 미국의 기술을 막 상용화하여 디지털 이동통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던 중으로서 국내의 산업체, 연구소 관계자들은 3G도 당연히 미국식으로 추진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인 시기로써, 심지어는 유럽식 기술은 국내에서 표준화도 추진하면 안된다는 의견도 매우 강했던 때였다.

1998년 5월 유럽은 일본과 손 잡고 공동으로 표준화를  추진하겠다는 발표를 하고, 공동 표준화 추진을 위한 비법인 기구를 설립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미국 역시 이에 대응하는 별도의 기구를 만들고자 하였다.  양측 모두 우리나라 표준화 단체 TTA에게 참여 의사를 물어 왔고, 당시 TTA에 구성되어 있던 3G 대응반에서는 양쪽 모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게 되었다. 

98년 가을 유럽과 일본은 준비 회의에 우리나라 TTA보고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고, 일본에서 추석 날 개최된 회의에는 TTA 3G 대응반 의장을 맡고 있던 나와 모토로라 한국 지사 직원, 삼성 일본 지사 직원 등 겨우 3명만 회의에 참석하였다. 

가보니, 유럽과 일본 그리고 미국의 또 다른 표준화 협회 대표들 20여 명이 그동안 준비해 왔던 대부분의 내용이 이미 합의가 된 협력각서 초안을 놓고 마지막 검토를 하는 자리로서 TTA에게는 98년 12월로 예정된 협력각서 체결을 앞두고 내용 설명을 해 주는 분위기로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협력 각서 내용 중에는 동 표준안이 기존 유럽에서 사용하던 이동통신 네트워크의 발전된(Evolved) 형태를 근간으로 3G 이동통신 표준을 만들어 나간다라는 말이 있었다. 이 말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나라가 만일 유럽식 3G 표준을 사용하게 될 경우 이미 발전된 유럽의 네트워크를 그대로 가져와야 하는 상황이 될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네트워크도 계속 발전하는 것인데 이를 발전하는(Evolving) 네트워크라고 고치자고 하였다. 

이는 미래에 우리나라가  도입할 경우에도 동 네트워크를 그대로 가져오기 보다는 네트워크를 계속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기술을  투입할 가능성이 생기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제안한 것이었다. 실제로 지금까지도 네트워크 부분은 지속적으로 발전해 오고 있으며, 앞으로의 이동통신 발전은 전파통신  구간뿐 만이 아니라 네트워크 구간의 발전 여하에 따라 서비스 수준이 달라진다는 것은 상식 수준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Evolving이란 단어로 바꾸는 제안은 기술적 관점에서 볼 때 매우 당연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마 몇 달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던 부분을 갑자기 처음 참석한 TTA 대표가 지적하고 수정하자고 하는 것을 받아 주자니 그동안 준비 해 온 기존 참여자들의 체면에 손상을 입는다고 생각한 것인지 또는 초기에 무시함으로써,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작은 TTA가(지금은 TTA를 작다고 생각하는 표준화 협회는 지구상에 아무도 없음) 앞으로 자꾸 이런 저런 의견을 내지 못하게 막아 버리자는 생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이후 그들과 친밀해진 다음에도 굳이 확인해 보지는 않아서), 여기서 물러서면 죽도밥도 안 되겠다는 생각에 30 분여 분간 논쟁을 벌이게 되었고, 결국 내 제안은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어진 회의에서도 보다 깐깐하게 질문과 논의를 진행하여 회의는 예정되었던 시간을 2시간이나 초과하여 6시에 예정되었던 일본에서 준비한 저녁 식사는 8시가 되어서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 TTA는 유럽, 미국 및 일본의 표준화 협회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논의를 하게 되었다고 가끔 혼자 생각해 본다.  


***3GPP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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