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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y Choi Feb 13. 2017

후드 잠바가 더러워지는 순간

<두더지>

(2013년 Daum Magazine: Fashion in Movie 에 연재되었던 글입니다)


옷 장 한구석에 아무렇거나 구겨져 처박혀 있는 후드 잠바 하나쯤 당신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멜란지 그레이의 프렌치 테리 소재로 만들어진 후드 집업 점퍼는 엄마가 심부름시켜서 동네 슈퍼에 뛰어갈 때 걸치는 소박하고 실용적인 아이템이다. 가벼운 비가 내릴 때도, 개 산책시키러 나갈 때도, 집 앞에 술 먹자고 찾아온 친구 만나러 갈 때도, 라면 국물 튀어 지저분해진 목 늘어난 티셔츠를 대충 가려야 할 때도 유용한 이 후디는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 로고가 들어간 스웨트 셔츠와 함께 90년대 이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전 국민의 옷장에 (주로 식탁의자에 걸쳐진 채로 발견되는) 자리 잡은 옷이다.


중세 유럽의 넓은 칼라를 붙인 수도사들의 튜닉이나 모자가 붙은 망토를 즐겨 입었다는 노동자 계층의 일상복에서 역사를 찾는 후디가 지금의 품이 넉넉한 상의에 모자와 캥거루 포켓을 더한 모양새로 자리 잡은 것은 추억의 브랜드 챔피언이 성공시킨 1930년대 이후의 스타일로 업스테이트 뉴욕의 추위를 못 견뎌하던 노동자들에게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70년대 뉴욕에서 자생된 힙합과 그 실용성과 스포티한 매력에 빠진 노마 카말리 등 디자이너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후디는 1976년의 전 세계적 블록버스터 <록키>의 실버스타 스탤론의 일상복으로 비치며 그 아이코닉한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감각 있는 캐주얼을 표방하는 유명 브랜드에 가나 동네 마트 옆의 반 값 할인 장터에서 사나 뭐 크게 다르지 않은 옷, 회색 면 후드 잠바다. 심지어 나랑 똑같은 거 앞 집 아줌마가 입고 있어도 별로 신경 안 쓰이는 유일한 패션 아이템 아닐까.

 


소노 시온 감독의 뜨겁고 치열한 영화 <두더지>의 스미다(소메타니 쇼타 분)는 이제 겨우 중학생인 소년이지만 같은 반 친구들과는 조금 다르다. 특별할 것 없이, 별 일 없이 살아가는 게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는 꿈인 스미다에게는 옷장이 없다. 그저 되는대로 주워 걸칠 뿐이다. 



그런 스미다가 폭발하는 순간, 그는 그 후드 잠바를 걸치고 있다. 그것은 십오 년 전에 폴로에서 샀던 소매 부분이 다 떨어져 나간 남편의 잠바이자, 갑자기 비가 내려 너무 추웠던 날 저녁 약속에 가기 전에 유니클로에 들어가 걸쳐 입은 나의 잠바이다. 십 대 중반의 소년이 가지고 있을 옷으로 별 특징 없는 티셔츠, 무릎 나온 청바지, 계절 바뀌어도 안 바뀌는 체크 셔츠와 함께 옅은 회색 후디는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이유삼아 하찮은 인생을 살고 있는 아버지가 사실은 네가 죽기를 바란다고, 지금까지 수 천 번 해온 고백을 싱글거리며 하고 나갈 때, 스미다는 도시 뒷골목에서 익명성을 확보한 범죄자의 얼굴을, 차림을 보여 준다.

 


이 영화로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신인배우상을 수상한 스물한 살의 소메타니 쇼타는 인생을 바꾸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살인을 저지른 후 자신이 그토록 혐오했던 밑바닥의 더러움을 입힌 얼굴로 거리를 헤맨다. 커다란 눈망울의 이 여린 소년의 얼굴에서 여러 가지 색이 섞여 무엇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페이스 페인팅이 벗겨질 때 우리는 그와 함께 마음속으로 간바떼, 를 외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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