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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y Choi Feb 27. 2017

속눈썹 붙이는 할머니에게 경의를 다해

<노라노>

(2013년 Daum Magazine: Fashion in Movie에 연재되었던 글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난히 패션에 관심이 많다. 한류라는 말이 만들어지기 훨씬 전에도 한국 여성은 옷 잘 입고 화장 잘 하는 것으로 외국에서도 유명했고 십오 년 전 유학시절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내노라하는 패션스쿨의 삼십여 명짜리 한 반에 열 자리쯤 차지하는 한국 학생들은 패션에 대한 한국인의 남다른 환상이랄까, 열정이랄까 하여간 그 비슷한 무엇가를 증명하는 듯하다. 

얼마 전 디자인 서적을 전문으로 하는 도서관에 들렀다. 이삼십 대의 젊은이들이 국내에서 귀하기 어려운 외국작가의 사진집과 사서 보기에는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정기 간행물을 뒤적거리며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나 역시 이런 책들에 대한 갈망이 항상 있는 터라, 패션이며, 사진이며, 건축 같은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는 책장을 헤집고 다니며 괜스레 마음이 뿌듯했다. 발렌시아가, 톰 포드, 알렉산더 맥퀸, 샤넬, 지방시... 영국에서 발간하는 패션 전문 미디어 Business of Fashion 의 모 기사처럼, 패션 디자이너들의 인터뷰와 작품들을 두껍고 매끈한 종이로 포장한 패션북 트렌드는 쉽게 가시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빽빽한 책장에 한국 디자이너는, 없었다. 정말, 없는 걸까? 

반 세기도 전에 패션쇼를 열였던 디자이너, 노라노는 여든다섯이다. 60년이 넘게 디자이너로서 살아온 노라노의 작품과 인생을 회고하는 La Vie en Rose 전이 기획,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본 다큐멘터리 <노라노>를 혼자 보는데 눈물이 났다. 영화관이 텅 비어서 다행이었다.



< 노라노>에는 노라노의 옷들이 등장한다. 1956년 한국 최초의 패션쇼 작품 중 하나인 허리선 아래로 절개된 뒷모습이 아름다운 린넨 재킷과 검은 단추가 검은 라인에 오도록 컷 되어 있는 숄칼라의 스트라이프 더블 브레스티드 드레스(전시회에 모델 변정수가 입은 그 옷이다), 동양적인 자연 모티브가 프린트된 화이트 실크 랩 드레스는 특히 인상에 오래 남는다. 하지만 나를 울린 것은 그의 오래되고 아름다운 옷이 아니었다. 죄악처럼 취급받았던 이혼녀의 가시밭길을 척척 걸어나간 강인한 여성 노라노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의상실 거실에서 작은 동그라미 한 바퀴를 돌고 있는 비슷한 나이대의 모델이 입은 트위드 재킷을 만져보는 중년을 넘긴 고객의 손길이었다. 

시즌에 한번 열릴 때마다 몇 조원이 들어가는 길고 좁은 런웨이 쇼를 동경하며 디자이너가 된 내게, 길가다 마음에 드는 옷을 보면 들어가 눈대중으로 내게 맞을 것인지를 살펴보고 십오 분이면 쇼핑을 끝내는 소비자인 내게, 노라노 살롱의 패션쇼는 왠지 울컥하는 것이었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 디자이너는 옷을 만들지 않는다. 대다수의 우리는 컴퓨터로 스케치를 하고 그것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치수를 첨부한 테크니컬 패키지를 공장에 보내 샘플을 만든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누군가가 입은 모습을 보며 만족하는 것은 몇몇 디자이너 하우스의 특권이다. 오랜 친구 같은 손님이 '오버코트가 하나 필요한데..'하며 찾아오면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원하던 바로 그 옷을 쓱쓱 스케치해주는 그런 디자이너가 노라노다. 나는 그가 부럽다. 할머니가 되도록 그렇게 옷을 '만들어'온 그에게 고개가 숙여진다. 



전후, 먹고사는 것을 해결하는 게 인생의 유일한 문제였던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에게 양장을, 기성복을, 미니 스커트를 전파한 사람. 단순한 양장점을 넘어 당시 시대를 풍미하던 영화들의 의상을 도맡아 하며 지금으로 치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일을 평생 해온 사람. 아직도 매일 인조 속눈썹을 붙이고 공들여 머리와 얼굴을 단장하는 사람. 그는 시간을 못 이기고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들 앞에서 인생에 정답은 없다고, 자신이 때로는 어리석고 때로는 지혜로웠다 이야기한다. 앞으로도 인생이라는 이 길에서 낯선 길을 선택할 용기를 잃지 않기를, 이라 말하는 그의 올 블랙 수트가 멋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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