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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튼바이시리우스 Mar 19. 2024

프롤로그_ 애. 쓰는. 삶

사회복지사 아빠의 '아이',  '글쓰기' 그리고 '삶'에 관한 애씀들

2022년, 여전히 코로나19의 시대였다. 우리는 아이를 가졌고 코로나19로 뒤덮인 세상의 작은 얼기 사이로 아이는 새 세상의 빛을 마주했다. 산후조리원의 산모들은 서로를 마주할 수 없었기에 식사도 생활도 각자였다. 그렇다고 해서 나 홀로 2주나 되는 시간을 덩그러니 밖에서 보낼 수는 없었다. 귀하디 귀한 이 시간을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함께할 수 없다니 얼토당토않다. 2주간의 두문불출을 조건으로 입실은 했지만 산모와 동고동락하는 다른 남편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살금살금, 행여 다른 산모들의 마음에 서러움의 불씨라도 지필까 내내 도둑 걸음이 되었다.


조리원의 생활은 평온했다. 정해진 시간에 아이를 만나고 필요한 육아 방법도 배웠다. 그러고도 남는 시간에는 알뜰살뜰 챙겨 온 육아책을 읽었다.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접하는 가장 익숙하고 확실한 수단은 책이었고 ‘웰컴 투 육아 월드’의 입장에서도 그 방식은 여전했다. ‘아이심리백과’를 읽을 때였다. 중간 단락쯤을 지날 때 졸린 눈이 번뜩거리는 게 아닌가. “3년만 죽었다고 생각하고 견뎌 내세요.” 고개를 숙여 다시 문장을 확인했다. 휘둥그레, 머릿속에서는 유튜브 섬네일이 생성됐다. ‘육아 지옥행, 3년의 진실!’, ‘실제 3년을 죽었다 살아온 육아 후기 방출!’       

'웰컴 투 육아 월드'의 입장에서도 그 방식은 여전했다.


육아의 고됨. 그렇다니까 그런가 보다 했다. 주변에서 누군가의 육아를 지켜볼 기회도 없었고 나의 느지막한 출산으로 인해 주위 친구들은 이미 아이들을 꽤 키운 시절이었다. 남의 아이는 쑥쑥 금방 큰다는 말처럼 육아는 정녕 남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딱 3년만 버티라고 하니 버티면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 주는 일인가 싶었다. 딱히 버티는 재주가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피해 가는 요령도 부려본 적 없으니 수더분히 또 그 말을 믿었나 보다.

     

막상 육아를 해보니 '3년의 죽음'은 틀린 말이었다. 무엇이 틀렸을까? 3년? 아니, ‘죽음’이다. 죽음은 고요하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가끔 산 자의 두 손을 비벼 뜨거워지는 열망을 고해보거나 망자가 이승과의 고요하고도 평온한 작별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하는, 오직 산자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다. 하지만 육아는 살아있는 세상이다. 생명과 본능과 본성이 뒤엉킨 세상이다. 여느 산 자보다도 더한 불안과 여느 망자보다도 더한 슬픔이 들어차기도 하는 살아있는 세상이다. 건강을 잃고 온 생의 사투를 벌이는 아이부터 정답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좌절에 이르기까지, 아이 앞에서 무너지고 쓰러지고 소멸하는 듯한 자신을 보는 날들이 있다. 그런 나를 마주할 때면 고요함이란 마치 지구 반대편 칠레 해변가에서 와인을 음미하는 낭만만큼이나 요원한 것임을 깨닫는다.     


여차저차 나의 3년도 그 마지막이 시절이 흘러가고 있다. 육체의 싸움은 정신의 싸움으로 확대되어 가고 생명의 신비는 온갖 심기를 거스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가 올랐던 길처럼 나의 육아도 첫 능선을 넘어서고 있다. 더불어 능선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결에 사회복지사로 살아온 삶의 매무새도 잠시 가다듬어보려 한다.


코로나19 때문인지 육아 때문인지 분간이 어렵게 되었으나, 아이의 탄생 즈음부터 세상의 축제는 사라졌고 내 삶의 축제도 사라졌다. 화려하고 빛이 나는 강렬한 자극은 사그라들고 진득하고 소소하지만, 끈질기고 농밀한 수다 같은 시간들이 지속되고 있다. 이제는 아이를 키우는 삶의 뜨거움과 사회복지사로서 겪은 삶의 알싸함을 한 그릇 수다 위에 부어 되직한 글을 한 편 써봄직한 시절이 아닐까 싶다. 그리하여 애써, ‘애’, ‘쓰는’, ‘삶’의 모습들을 담아보려 한다. 애달프고 쓰디쓴 삶이 되었든 우리의 소소한 삶이 되었든, 그 무엇 무엇들을 담담히 ‘삶’의 자국이라며 꾹꾹 눌러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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