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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bysparks Dec 26. 2018

[D+1] 이렇게, 드디어

흥정의 나라 발리에 도착했습니다

하우 머치 두 유 원트?


발리 공항에 우리를 마중나올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몇몇의 사람들은 마치 우리가 올 줄 알았다는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와서는 자꾸만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발리 생활의 반 이상을 차지하게 될 '흥정'이 공항을 나서자마자 시작되었다.

"하우 머치 두 유 원투?"

진검승부와도 같았던 얼마를 원해?가 발리인과 나눈 제대로 된 첫 대화였다.




서울에서 발리까지 오는 길은 무척 험난했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힘들다는 말을 잘 안하는데, 이번 여행은 집 현관문을 나서 발리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고난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것이 과연 아기 하나가 추가됐기 때문인가 싶은 의구심이 들었다.


자정 비행기라 집 앞으로 오는 공항버스 막차를 타고 인천공항에 가기로 했다. 34kg, 17kg의 캐리어에 각각 배낭 하나씩, 나는 10kg이 넘는 아기를 앞에 하나 더 맸고, 남편은 들기도 밀기도 뭐한 기내용 유모차를 맡았다. 집에서 정류장까지는 고작 10분 거리라 8시쯤 집을 나섰는데 걷는 것조차 만만치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거북이보다 못한 속도로 엉금엉금 걸어가다 정류장이 보이는 사거리 신호등 앞에 섰더니 웬걸 공항버스가(막차가!!) 우리를 앞서 지나가고 있었다. 놓치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신호등이 켜지자 마자 나는 달리기 시작(달린다고 생각했다)했다. 앞 뒤로 10kg씩 되는 짐을 메고 20kg에 육박하는 캐리어를 밀고 달리는 건 엄밀히 말하면 달리는 게 아니지만. 유모차 때문에 뛰지 못하는 남편 대신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빨리 걸었고 떠나려고 문을 닫는 버스를 겨우 잡았다. 입에서 피맛이 났다.


뭐 그 뒤로도 이런 비슷한 이야기다. 공항버스 안에서 단호는 내내 울었고, 겨우 잠들 때쯤 인천에 도착하니 혼이 다 빠졌다. 비행기를 탈 때까지 잘만 자던 아기는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눈을 떴고, 새벽녘 경유지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기억을 잃었다. 단호를 앉고 있었던가 잡고 있었던가 잠시 몇초 정도 졸았던가. 비몽사몽 어렵사리 발리 공항에 도착했더니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우리의 여행을 기록으로 남기던 남편이 고프로를 들고 있던 걸 보고 입국심사장에 있던 경비원이 다가왔고, 찍어놓은 영상을 보자며 화를 내었다. 별 것 없는 영상을 보여주고 지우겠다고까지 했는데도 그는 계속해서 화를 냈다. 마치 우리를 테러범 대하듯 하는 도가 지나친 그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내가 화가 났다. 나는 그에게 잘 알아들었고, 이만하면 된 것 같으니 그만하라고 다시 화를 냈다. 이렇게 몇 번의 화가 오고가는 사이 단호는 내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달라고 징얼댔고 나는 들고 있던 걸 얼떨결에 줬던 것 같다. 잠깐, 여기서 또 일이 하나 있었지. 입국하려고 보니 발리는 30일 이상은 비자 없이 체류하지 못하는 섬이었다. 놀라운 건 우리는 이 사실을 발리 공항에 도착해 알게 되었다. 두 달이나 이곳에 있기로한 우리는 일반 입국심사 줄에 서지 못하고, 부랴부랴 방법을 찾아서 연장 비자를 공항에서 산 뒤, 다시 심사를 받고 빠져나왔다.


이륙 후 한 시간이 훌쩍 넘어 입국심사까지 마친 뒤 대형 코끼리 같은 무거운 짐들을 찾았다. 이제 좀 나가보려나 할 때쯤 문득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하며 모든 가방을 수없이 뒤졌지만 정말 없어졌다. 비행기에서 내린 뒤 지갑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고프로 때문에 경비와 한창 싸울 때였을까? 비자를 사겠다고 카운터 몇 군데를 왔다갔다 하던 때였던가? 나는 다시 그 지옥 같은 입국심사장으로 들어가 사정을 이야기 한 뒤 경비원을 대동하고 입국심사를 받던 곳의 바닥을 훑었다. 네이비색 정사각형 내 지갑은 어디에도 없었다. 분실물 센터와 수화물장 경비 아저씨에게도 가봤지만 지갑 같은 건 못봤다고 했다. 문득 아까 아수라장 같은 상황에서 단호가 달라며 떼를 쓰다 줬더니 물고 빨고 하던 게 지갑이었던 게 생각났다. 윽 단호가 어디다 던져 버린 것이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신용카드와 국제체크카드, 환전해온 돈 일부가 그곳에 다 들어있었다. 신이 나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발리가 신들의 섬이라더니 정말 오자마자 나를 시험하는구나. 몇 시간을 날아 미지의 섬에 왔다는 설레임 따위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머리가 핑 돌 만큼 어지러웎고 비행기에서 밤새 잠을 못자고 우는 아이를 보느라 진이 다 빠졌다. 발리고 뭐고 미안하지만 집에 가고 싶었다.


좀비처럼(나는 정말 좀비가 되고 싶었다) 다시 수화물을 찾는 곳으로 걸어나가는데 경비가 나를 불렀다. 한 손으로 누군가과 통화를 하며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내 이름을 불러줬다. 그는 지갑을 찾은 것 같다며 내 지갑 속 신용카드의 이름을 확인하고 있다고 했다. 너무 힘이 빠져서 좋아할 힘도 없었다. 아 지갑이 있구나. 지갑을 찾았구나. 몇 분 뒤 천사 같은 다른 경비가 내 지갑을 들고 달려왔다. 그는 마치 자기 일처럼 좋아해주었다. 타국에 도착하자마자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의 절망을 그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공항을 빠져나왔고 그 뒤 곧장 만난 발리인이 바로 우리를 두팔 벌려 환영해준 택시드라이버였다. 그는 선한 미소를 지으며 얼레벌레 정신 없는 우리를 밀어부쳐 대충 자기 차에 데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우리를 발리에 이제 막 도착한 어리숙한 동양인 관광객쯤으로 봤다면 오산이다. 이런 저런 일을 겪고 힘이 다 빠졌지만 다수의 동남아 국가에서 택시 및 툭툭 흥정으로 단련된 나와 ‘가격은 내가 정한다'는 원칙 하나로 사는 깎기의 달인 남편이 한 팀이었다. (귀여움으로 사용할 베이비 카드는 나중에 시장에서 좀 힘을 발휘했다. 남자에게는 잘 안먹힘)


"웨얼 아유 고?"

"꾸따"

"오케이 렛츠 고"

"하우 머치?"

"400k(32,000원)"

"익스펜시브"

"하우 머치 두유 원투?"

"200k(16,000원)?"

"노우"

"아이 노우 댓추 투 익스펜시브"

"300k(24,000원)?"

"노우"


사실 꾸따까지 얼마로 가야 괜찮은지 알지 못했다. 그냥 일단 반으로 깎아봤다. 완강하게 나가는 우리와 얘기하던 눈치 빠른 첫번째 드라이버는 뒤돌아 가버렸다. 뒤에 줄서 있던 새 드라이버가 다가왔다. 새로운 아저씨는 아예 우리 짐을 들고 천천히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웨어 두유 고?"

"꾸따"

"하우 머치 두유 원트?"

"200k?"

"300k?"

"노우"

"오케이 댄 200k"


어라. 너무 쉽게 간다고 하니 뭔가 당한 기분이었다. 우리는 서로 눈치를 보다  일단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택시 카운터에 지역별 택시 요금이 적힌 리스트를 발견했다.금액을 확인한 남편은 저만치 앞서가는 드라이버를 불러 세워 안가다고 했다.


"와이?"

"유 익스펜시브 댄 노말 택시 프라이스"

"노우 데이 애드 서비스 차지"

"..."

"하우 머치 두유 원트?"

"10$"

"노우 위 페이 파킹 투"

"10$"


........


"오케이"


400k(32,000원)에서 시작된 택시비는 약 10분 후 10$(11,000원)이 되었다. 그 뒤로도 매일 같이 이런 흥정이 계속되었다. 후려치고 떠나고 잡고 뒤돌아서고 다시 흥정하는 루틴의 반복이다. 무거운 코끼리 같은 짐들을 좁은 차에 꾸역 꾸역 싣고 차에 탔다. 에어컨 바람이 시원했다. 이제서야 단호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고, 남편과 한숨을 돌렸다.


이렇게, 드디어, 발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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