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붓의 텃세
그랩 기사를 불러 세 가족의 무거운 짐을 싣고, 북쪽으로 달리고 있다. 흡사 시골 마을의 읍내 같았던 꾸따와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마을은 좀 더 한적해보이고, 가로수 사이로 군데 군데 키 큰 야자수와 넓은 논이 숨어있다 나타나다 했다. 고맙게도 차에서 내내 단호가 자준 덕분에 차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 시간의 드라이브를 즐겼다. 8차선이었던 도로가 4차선으로 다시 2차선으로 줄어들면서 우붓에 도착했다.
우붓에는 2주 정도 머물기로 하고 지난 밤 내내 숙소를 찾았다. 꾸따에선 호텔에 묵었으니 이번엔 에어비앤비를 통해 독채를 빌리고 싶었지만 마음에 든다 싶으면 에어컨이 없거나(우붓은 에어컨이 없는 방이 꽤 된다. 7~8월의 우붓은 실제로 쌀쌀하게 느껴질 정도라긴 하지만, 그건 그때 이야기), 너무 외딴 곳에 있었다. 고민 끝에 겨우 고른 집 하나는 간발의 차로 예약이 끝나버렸다. 망연자실하던 남편의 얼굴이 떠오른다. 절박한 심정으로 호텔앱으로 돌아가 찾아낸 곳이 바로 우리가 지금 막 도착한 '루마타만(Rumah Taman)'이었다.
지도에서 봤을 땐 우붓 왕궁 사거리에서 가까워보였는데, 왕궁에서부터 차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절망적인 건 그 길이 평지가 아닌 언덕이었다. 그랩 기사는 언덕 위 외딴 곳에, 그러니까 호텔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길 한 가운데 우리를 내려주면서 여기가 맞다고 했다. 자세히 보니 한 사람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골목 입구에 초라한 나무 간판으로 '루마타만'이 수줍게 적혀 있었다. 제대로 찾아온 거 맞나. 우르르 쾅쾅 굉음 소리를 내는 진짜 진짜 무거운 트렁크를 끌고 앞으로 전진하다 보니 왼쪽으로 거짓말 같이 신기한 나무 문 하나가 나타났다. 마치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신비의 문을 열고 들어가도 일반적인 호텔 로비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그곳에는 신비한 정원이 있었다. 돌로 만든 작은 연못에는 잉어로 추정되는 커다란 물고기들이 살고 있고, 새장에는 엡손 잉크젯 광고에 나올 것 같은 아름다운 색의 새들이 맑고 고운 소리를 냈다. 중간에 나무로 만든 책걸상이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 전화기를 비롯해 노트북과 메모지 등이 있는 걸로 보아 거기가 로비인 듯 했다. 동남아 특유의 순박한 얼굴한 현지인 스태프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우리 숙소는 2층 첫번째 방이었다.
하루에 2만 4천원짜리 방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넓은 침대와 두툼한 나무로 만든 탁자, 수납선반, 화장실 문 그리고 밖이 훤희 보이는 시원시원한 통유리까지 모두 마음에 들었다. 헤밍웨이가 이 방을 본다면 글 쓰기 좋은 곳이라고 말할 것 같았다. 유리문을 열고 나가면 방 크기의 반 정도 되는 넓은 테라스가 있다. 테라스 왼쪽에는 부엌과 바 테이블이 있고, 오른쪽은 귀여운 빨래 건조기와 앉아 쉴 수 있는 나무 소파가 있다. 테라스 앞에는 키큰 야자수들 사이로 두 채의 집이 보였다. 사람들이 1층 거실에서 왔다갔다 했다. 밤에도 무섭지 않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짐을 대충 풀고, 아기띠로 단호를 메고 집을 나섰다. 다행히 지금은 내리막길이다. 민가와 작은, 아주 작은 가게, 얼마나 작냐면 한 평 정도 되는 가게 안에 과자, 물 정도, 서울 우리집 부엌살림보다 더 적은 물건을 작은 서랍장에 넣고 물건을 파는 그런 작은 가게와 그보다 아주 조금 더 큰 가게, 그것보다 좀 더 큰 가게, 그리고 세탁소가 군데 군데 있었다. 그 길을 걸어다니는 건 우리 세 식구 그리고 동네 닭들뿐이었다. 꾸따에서도 느꼈지만 발리 사람들은 걸어다니지 않는다. 모두 스쿠터 위에서 움직인다. 그래도 신기할 정도로 몸이 갸냘프다. 나보다 덩치가 좋은 남자가 흔치 않았다.
11키로의 단호를 메고 한참을 걷고 또 걸어 코코마트에 도착했다. 발리의 대표적인 대형 마트 체인점이자 우붓의 랜드마크. 어디에 가든 일정의 시작은 장보기다. 이제 부엌이 생겼으니 본격적으로 단호의 이유식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에서 가져온 일주일치 실온 이유식은 어제로 다 끝이 났다. 다시 불꽃 다지기와 뭉근히 끓이기 노동이 시작될 것이다. 야채야 뭐 적도나 극동지방이나 사람 먹는 게 다 비슷비슷하지만, 육류와 생선류는 조금 망설여졌다. 한국에서는 수입산 소고기는 쳐다도 보지 않고, 한우 안심만 먹였는데 여기서는 beef라고 적힌 고기의 정체를 적혀 알 수가 없었다.
너는 어디서 온 소니? 호주에서 온 비프와 로컬 비프의 가격 차이가 꽤 컸는데 우리와는 반대였다. 로컬 비프가 호주 비프의 반 값도 되지 않았다. 호주 소는 여기서도 분명 수입산이지만, 어쩐지 발리 소보다 나을까 싶은 건 기분 탓이었을까. 로컬 소 가격이 너무 싸니 어떻게 키웠길래 싶은 생각도 들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차라리 생선을 사자. 코너를 옮겨 생선 쪽으로 갔다. 아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아는 건 샐몬과 튜나인데 이유식에 넣기엔 모르겠다. 냉동실 중간에 'Barramundi'라고 적힌 흰살 생선이 살코기만 랩으로 쌓여 있었다. 준 해양학자급 해양생물 지식정보를 자랑하는 남편은 바라문디가 아주 큰 유명한 생선이라고 설명해줬다. 낯이 익은 생선이라 다행이지만, 이게 먹을 수 있는 건가. 나도 아직 생전 안 먹어본 생선을 단호에게 먹여도 되나 또 다시 고민에 빠졌다. 에라 모르겠다. 바라문디를 샀다. 단호의 오늘 저녁은 바라문디 애호박 당근 밥이다.
장 본 게 꽤 됐다. 부엌에서 쓸 칼이랑 기름도 사고, 단호 기저귀에 우리 먹을 식량, 맥주, 단호의 이유식 재료, 망고 그리고 단호 목욕과 손빨래 할 때 쓸 대야도 샀다. 검정색 플라스틱 대야를 끙끙대며 선반 위에서 꺼내고 있는데 마트 직원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저걸 뭐하러 사나 싶은 궁금함이 얼굴에 가득했다. 나는 아기를 씻길 거라고 말해줬다.
그리고 곧 일이 터졌다. 남편 양손에 장본 봉투가 가득하고, 나도 단호를 맨 채 장본 봉투와 단호 대야까지 들고 마트를 나와 그랩을 부르려는데 부르는 족족 신청을 거부하거나, 수락을 했다가도 우리 위치를 확인하고 다시 거절했다. 한참 후에 한 그랩 기사가 앱에서 픽스된 가격의 두 배 이상을 주면 가겠다고 비밀 메시지를 보내왔을 때 알았다. 뭔가 이상하다. 짐에 아기에 대야까지 들고 그랩을 부르느라 낑낑대는 우리를 보고 로컬 택시기사들이 다가오더니 "여기선 그랩을 부를 수 없다"고 얘기했다.
발리는 원칙적으로는 그랩이나 고젝 등의 차량공유서비스 사업을 할 수 있지만, 몇몇 지역에서는 지역 커뮤니티의 권한으로 차량공유서비스나 온라인 택시 등의 영업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우붓은 그중 아주 대표적인 곳이었고, 우붓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위치한 코코마트 앞은 그랩 기사들이 얼씬도 하지 못할 곳이었던 것이다.
초보 관광객 가족이 상황파악을 하는 듯 하자, 마트 앞에 진을 치고 있던 대장 같은 택시 아저씨가 다가와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마트에서 숙소까지는 2키로 남짓으로, 보통 그랩에서는 20k(1,600원) 정도 안팎이었을 거리였다. 택시 기사는 200k을 불렀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나는 눈치 싸움이나 소모전이 싫어 물건 값도 잘 깎지 않는다. 그런 나도 이런 얼토당토 않은 가격에 화가 났다. 됐다고 하자 아저씨는 인심을 쓰듯 150k 정도까지는 깎아주겠다고 했다.
아니 이곳은 먹고 사랑하고 기도하려고 오는 우붓 아닌가. 이혼과 속세에 지쳐 쓸데없는 욕심과 삶의 무게를 덜고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고 줄리아로버츠가 찾아 온 우붓에는 곳곳에 요가 학원과 비건 레스토랑이 수두룩 하다. 자연과 동물을 사랑하고, 자기 이익에만 혈안이 된 세상의 떼를 벗고 수련을 통해 건강한 삶을 되찾고자 하는 머리 길고, 헐렁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동네란 말이다. 지역사회의 경제를 지키기 위해 차량공유서비스를 제한하는 것까지는 이해하겠지만, 그것과 이동수단 없는 관광객들에게 밑도 끝도 없는 가격으로 바가지를 씌우는 건 다른 얘기다.
많이 양보해서 100k을 불러봤지만, 옵션 없는 우리 사정을 아는 택시 아저씨는 됐다고 돌아섰다. 100k이 작다고? 이런 도둑놈을 봤나. 주변의 다른 택시 기사들도 우리를 보고 구경했다. 화가 날 때로 난 남편은 그냥 걸어가자고 했다. 다 들고 가면 된다고. 고작 2키로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크레센도처럼 높아지는 언덕길을 물과 맥주 그리고 대야에 아기까지 메고 걸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몇몇 택시 기사들이 다가왔고, 같은 흥정이 이어졌다. 몇 분의 실갱이가 이어졌고, 결국 그나마 마음 약한 아저씨와 90k로 극적 합의를 보고, 택시에 올라탔다. 아저씨는 숙소에 가는 내내 우붓의 입장에서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사정을 이야기 했다. 반은 이해했고, 여전히 반은 이해할 수 없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진이 빠졌다. 덕분에 우붓에 도착한 첫날, 온몸으로 이곳의 분위기를 배웠다. 발리에서도 내륙 깊숙한 곳에 요새처럼 숨어 있는 동네. 자기만의 아우라를 오롯이 뿜어내는 이 동네는 동네 어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정표를 보지 않고도 '우붓이구나'를 알 수 있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러 오는 건 이곳을 찾아오는 우리 사정이고, 여기 사정은 또 다른 거였다.
저녁에는 한국에서 친오빠가 우붓에 왔다. 열흘의 휴가 중 3일은 우리와 함께하고 롬복으로 들어가 스킨스쿠버를 할 계획이었다. 고작 일주일 외국에 있었다고 오랜만에 만나는 한국인이자 가족인 오빠를 보니 무척 반가웠다. 오빠의 캐리어 속에는 친정엄마가 보내온 김치와 멸치볶음, 쥐포 그리고 공항에서 샀다는 위스키 한 병이 들어 있었다. 단호를 재우고 테라스에 셋이 앉아 미고랭 라면에 위스키를 나눠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우붓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