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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푸 Sep 30. 2015

셋이서 정박하다

Muriwai beach

  공항에 곰군을 데려다 주고 오는 길. 무사히 비행기에 올랐다는 곰군의 카톡에 우리는 공항을 떠 근처에서 간단히 장을 보고 무리와이해변으로 향했다. 오클랜드 공항에서 한 시간 거리라 캠퍼밴 운전 적응에 좋을 것 같았다.          
 
  갑자기 내 뒷차가 나를 향해 클락션을 네 번을 울리고 옆 차선에서 따라오며 주먹을 창밖으로 휘두르다가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 올리는 난동을 부린다. 한국에서는 무리없는 끼어들기인데 여기서는 크게 잘못한 일인가보다. 여기 와서 가장 심장떨리는 순간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99프로 낙원의 천사였는데...겨우 앞질러 가길래 가슴을 쓸어 내리는데, 몆백미터 앞 교차로에서 창밖으로 팔을 빼고 가운데 손가락을 하늘 높이 쳐든 채 내 차를 기다리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는 아연실색. 그가 몰래 우리를 따라와 밤에 복수를 하러 차에 난입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상상으로 가슴이 타다가. 그 느낌이 많이 누그러들 때쯤.... 우리는 목적지인 무리와이모터캠핑장에 도착했다.  
 
  1박에 30불인데 여태껏 묵었던 홀팍중 가장 마음에 든다. 붐비는 사이트에서 언덕 하나 넘으니 넓고 오래된 나무들로 둘러싸인 아늑한 비밀의 사이트가 오목하게 묻혀있고 가지를 낮게 내린 늙고 고요한 나무들이 아이들을 불러올리고 있었다.  나는 그 덕에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차근차근 정박을 준비했다. 
 


나무는 가지를 낮게 드리우고 아이들을 불러올린다



늙고 고요한 나무가 우리를 지켜주는 것 같아 나는 차근차근 정박을 준비할 수 있었다



  무리와이해변은 흑사장이다. 언덕같은 진입로를 넘어서자 눈앞에 검은,금,은빛의 고운 모래카펫이 펼쳐졌다. 흑색이 열을 빨아들여 발이 타들어가는 것 같아 체신머리 없이 발을 높이들고 폴짝거리지만 않았더라면 미래소년 코난이 아니라 흡사 벨벳카펫 위를 걷는 귀족의 기분을 낼 수 있었을 텐데...무척 아쉽다.     


  처음엔 검은 해변의 바다가 주는 느낌이 낯설고 무서웠는지 선뜻 바다에 몸을 싣지 않던 오누이는 이틀을 지내는 동안 제법 파도와 잘 어울려 놀아,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가 이곳에 와서 내 심신이 가장 편했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라이프가드가 허리에 구조대를 차고 눈을 떼지 않아 든든했고 아이들은 놀이에 정신이 팔려 세 시간은 너끈히 나를 잊고 놀았다. 나도 한국에서와는 달리 수영복과 햇볕에 대담해졌다. 자외선이 나를 깊숙히 침식하긴 했으나ㅎㅎ 하루 더 묵기로 한 건 셋 모두에게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저녁을 먹고 지열이 조금 식기를 기다려  우리는 해변으로 나가보았다. 언제 뜨거웠냐는듯 모래는 차분하게 식어 있었고, 우리는 아까의 아쉬움을 봉창하듯 제법 우아하게 걸어들어가 의자까지 펼쳐놓고 석양을 감상했다. 해가 꼴딱 넘어가자 변덕스런 신체들은 다시 춥다고 아랫니와 윗니의 진동으로 반응한다. 하루에 사계절이 있다는 이 나라의 여름날씨가 아래로 내려올수록, 해변에 가까울수록 더 잘 느껴지고 있다. 
 

  

어디서나 꼬불쳐 눕는 것을 좋아하는 안 남매


지는 해를 받치고 싶은 모모의 발바닥


흑모래의 매력에 경배하는 안 군

  첫날 저녁, 옆 캠퍼밴 가족이 문을 두드려왔다. 이 사이트에 우리 둘 뿐이라 아까부터 눈인사를 보내왔던 터다. 스위스에서 왔다는 이 부부에게는 다섯 살짜리 천하무적 늦둥이 외동아들이 하나 있었다. 아이들의 놀이가 접점이 되어 둘째날은 저녁을 함께 먹었다. 어딜가나 캠퍼밴 전기선 연결하듯 아들 친구를 찾아 다닌다는 두 부부. 우리가 떠나는 날 아침, 남아프리카에서 오셨다는 가족의 참한 외동따님에게 또다른 전기선을 연결하고 있는 것을 보니, 겨우 어려운 숙제 마친 아이같은 홀가분한 표정에 슬금 웃음이 난다. 



한국, 스위스, 남아프리카로부터 날아와 뉴질랜드에서 만난 사람들. 개구쟁이 요제프는 금발의 아가씨와 다시 친구가 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스위스로 이민을 가고도 살기 만만치 않아 늘 이 곳에서 위안받는다는 이 부부. 이번이 세 번째

란다. 이 나라의 어떤 것이 우리에게 위안을 주고 있는 걸까. 놓인 지 얼마 안되는 처지라 정확히 표현하기는 힘들지만...많은 상황에서 예측가능함이 주는 안정과 믿음이 한몫하는 건 사실이다. 상식이 통할 것이라는 믿음. 오전에 도로에서 마주친 그 'ㅃㅋ남'은 그날밤 우리차에 난입하지 않았으므로 그 믿음은 아직 유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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