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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Jun 29. 2017

여행이라기보다는 유목에 가까운

2017 몽골 여행(6/6-6/7)

비행기가 육중한 몸을 움직이자 빗줄기는 창문에 작은 강을 만들었다. 기체는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회색빛 연기 속으로 들어갔다. 15박 16일 동안 함께 하게 될 동행들과는 멀리 떨어진, 비행기의 가장 끝 창가 자리에 앉아서도 나는 우리들의 떨리는 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우리는 낯선 미지의 땅과, 서로를 향한 떨리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내뿜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의 여행을 조용히 떠올려보려 했으나 잘 그려지지 않았다. 거의 어떤 사전 정보도 갖고 가지 않는 여행은 실로 오랜만이었고, 또래의 누군가와 함께 여행의 전 일정을 함께하는 것은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늘 혼자 발달된 도시로만 여행을 떠나던 나에게 이번 여행은 그 자체로도 큰 모험이었다.


비행기가 회색빛 구름 속으로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두꺼운 구름 층을 벗어난 비행기의 창 밖으로 해 질 녘의 햇살이 비췄다. 앞으로 보게 될(것이라고 짐작하는) 몽골의 초원을 닮은 구름이 진하게 깔려있었다. 순백의 들판이었다. 육지와 하늘이 구분되지 않는 곳이었다.

약 세 시간 가량 열에 들떠 잠도 이루지 못한 채 책을 읽거나 생각에 잠겨 시간을 보내는 동안, 비행기는 어느새 울란바토르 상공에 도착해있었다. 착륙을 알리는 기장의 익숙한 방송이 들렸다. 상공에서 바라본 울란바토르의 불 켜진 도로는 마치 혈관 같았다. 빛의 혈관. 가로등이 밝게 켜진 도로를 질주하며 희미한 자국을 남기는 자동차들의 흐름은 마치 혈관 속을 흐르는 핏물 같았다. 자동차라는 피와, 심장과 각종 기관을 닮은 높고 육중한 건물들. 울란바토르는 내 생각보다 훨씬 커다란 도시였다.

그러나 지상으로 내려와 바라본 울란바토르는 어느 정도는 웅장했지만 대체로 아기자기한 느낌을 주는 도시였다. 아직 크게 발달한 곳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공항은 예전에 한번 가 보았던 피렌체 공항과 비슷한 크기였다. 나가는 출구는 한 군데뿐이었고, 체크인 데스크는 네 다섯개 정도로, 한 번에 딱 한 항공사의 업무만 처리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였다. 공항의 이름은 역시나 '칭기즈칸'공항이었다.

밤늦게 도착한 우리는 울란바토르의 야경을 가볍게 구경한 뒤, 다음날 여정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어느 도시나 야경은 비슷비슷하구나-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한 숙소를 함께 쓴 우리들의 작은 흥분은 바닥부터 스멀스멀 차올라 천장까지 가득했다.


날이 밝은 몽골은 전날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주고 있었다. 구름은 장식용 솜을 떼어 붙여놓은 듯 지상 가까이 내려앉아 있었다. 하늘은 높은 듯 낮아 보였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한 하늘이 여행의 기간 거의 내내 계속 이어졌다. 나는 자연스레 손을 뻗곧 했다. 그곳에선 자연의 모든 질감이 또렷하게 잡힐 듯했다.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니 교통체증이 현저히 줄어들고 차들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금세 사방엔 우리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진짜 우리만의 14박 15일 여행이 시작되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이라곤 오직 들판과, 언덕 같은 산들과, 각종 동물들 뿐이었다. 소리는 넓은 공간을 가까운 곳에서 밀도 있게 채우다가 재빠르게 저 먼 곳으로 사라져 흩어지곤 했다. 그 누구도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들려오는 소리라곤 오로지 바람이 귀를 스치고 지나가며 내는 소음뿐이었다. 구름이 움직이는 소리마저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러시아 밴이라고도 불리는 푸르공 혹은 우아직은 2주 동안의 시간 동안 오직 우리만의 세계였다. 푸르공은 몽골어로 '아버지의 넓은 품'을 뜻한다는데, 아버지의 넓은 품이라기엔 다소 덜컹거리는 승합차였다. 덜컹거리던 이유가 승차감 때문인지, 아니면 도저히 길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오프로드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나는 어떤 차로든 그 길을 달리면 다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쨌든 우리는 그곳에서 먹고 떠들고 책을 읽고 잠에 들며 3500km나 되는 거리를 함께 달렸다. 3500km라는 거리는 숫자로 보나 지도로 설명하나 사실 밤하늘을 가리키며 3천5백 광년 떨어진 별을 가리키는 일만큼이나 추상적이어서 와 닿지는 않지만, 어쨌든 아주 긴 시간을 달리는 동안 아주 심하게 덜컹거리던 차 안은 오직 우리만의 우주였다.

동행들이 여행의 막바지가 되었을 무렵 내게 여행의 어느 순간이 가장 좋았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이 작고도 넓은 차 안에서 보내던 대부분의 시간들이었다고 말했다. 요 몇 년 사이 가장 크게 웃고 떠들며 꾸미지 않던 내 모습을 보여주게 해 준 사람들. 그 사람들과 보낸 대부분의 시간은 이 작은 우주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완벽한 동행이 주는 여행의 즐거움을 비로소 처음 느낄 수 있었다. 몽골 여행에서 기억나던 장면들은 희미한 햇살을 받으며 잠에 들어있던 동행들과, 내 손등을 스치던 몽골의 바람, 비현실적으로 흘러가던 창 밖의 풍경들, 그리고 묵묵히 내 앞에서 운전하던 기사님과 가이드의 뒷모습이었다.

누군가를 뒷모습으로 기억한다는 건 슬픈 일일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때로는 떠올리면 행복한 뒷모습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나는 덜컹거리던 푸르공안에서 처음 배웠다. 그들의 뒷모습을 떠올릴 때면 나는 여전히 두근거리던 그때 그 시간을 자연스레 생각한다.


첫날의 처음 목적지였던 곳은 바가 가즐링 촐로라 불리는 기암계곡이었다. 화강암석 지대로 많은 승려들이 전쟁 동안 숨어 지냈던 곳이라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어쨌든 압도적인 몽골의 첫인상이 되어주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불그스름한 돌과 푸른 하늘이 가득한 곳에서 가능한 말이라고는 오직 '우와'라는 감탄사뿐이 없었다. 몽골의 대지는 명암이 생략된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아주 강렬한 모습으로 눈 앞에 다가왔다. 누군가 일부러 땅의 곳곳에 조형물처럼 자연경관을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무신론자조차 신이라는 어떤 절대자의 존재를 떠올리게 만드는 땅이었다.

몽골의 또 하나의 특징은 건조한 날씨였다. 햇살은 모든 것을 태울 기세로 강렬하게 내렸으나 건조한 기후 탓에 덥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여름만 되면 마치 공기가 아닌 수증기를 마시고 물 밖에 있어도 물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우리나라의 기후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그래서인지 공기는 맑고 가볍게 느껴졌다. 손을 스치는 바람의 촉감이 좋아서 자주 창 밖에 손을 내밀거나 불어오는 바람에 얼굴을 들이밀곤 했다.

기나긴 첫날의 이동을 끝마치고 우리는 우리의 잠자리가 되어줄 게르에 도착했다. 말로만 듣던 유목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약 10시간이 넘는 이동을 한 탓에 나는 게르에 도착하자마자 감히 유목민의 삶이 어떤 것인지 가늠해보았다. 짧은 주기로 짐을 풀고 다시 싸며 이동하는 행위를 여행이라고 부른다면, 몽골 여행에서의 이동은 여행이라기보단 차라리 유목민의 그것에 가까웠다. 우리는 정해진 일정을 위해, 다음에 자야 할 게르로 향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동했다. 비록 우리에게 풀을 먹일 가축은 없었지만, 그 대신 풍경을 먹일 두 눈과 머리가 있었다. 우리의 몽골 여행은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민의 삶과 비슷했다. 이동이 유목민의 일이라면, 우리의 일 역시 부지런히 이동하는 것이었다.

몽골 여행을 하며 신기했던 점은 전혀 뜬금없는 장소에 놓여있는 익숙한 물체들이었다. 이를테면 허허벌판에 놓인 농구 코트라든지, 어색한 자리에 낯선 모습으로 자리 잡은 컨테이너 박스 등이 그것이었다. 그들은 마치 자기는 당연히 여기에 있어야 한다는 듯이 주장하고 있는 듯했다. 내 머릿속 고정관념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곳에 놓인 물건들은 기괴하거나 혹은 외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경계를 알 수 없고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몽골의 들판에선 혼자 놓인 모든 것들이 그렇게 보였다. 아마 누군가 멀리서 우리를 봤다면 우리 역시 그런 모습으로 어색하고 기괴하게 놓인 무언가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 땅에서 해는 9시를 넘겨서야 넘어갈 듯 말 듯했다. 우리는 늘 지지 않는 해를 보며 어색하게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하고 별을 구경했다. 별을 구경하기 위해 우리는 늘 어둠을 기다렸다. 그러나 처음 며칠간은 어둠 속에서도 달빛이 마치 태양처럼 밝게 빛났다. 별은 달빛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빛을 보기 위해 어둠을 기다리는 일이나, 어둠을 기다렸으나 떠오른 또 다른 밝은 빛 때문에 빛이 보이지 않는 일이나, 아이러니하면서도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고수리 작가님의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는 책 제목이 떠올랐다. 몽골의 달빛은 너무나 밝아서 눈이 부실 정도였고, 우리는 그 달빛에도 걸을 수 있었다. 현실감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땅이었고, 날들이었다.



지난 6/6부터 6/21까지 긴 몽골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좋은 동생들 덕에 행복한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 기록들을 차근차근 남길까 합니다. 아직 써야 될 글이 많은데 이렇게 또 일을 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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