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를 보고 난 뒤의 이야기들
이쯤이면 볼 사람은 다 봤을 것 같아서 올리는 흑백요리사 재밌게 본 사람의 흑백요리사 후기를 가장한 내 요리 이야기.
하나의 프로그램이 이렇게까지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며 화제가 됐던 건 꽤나 오랜만의 일이었던 것 같다. 올 하반기를 강타한 단 하나의 프로그램을 뽑아야 한다고 한다면,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이 주저 없이 흑백요리사를 떠올릴 것이다.
가만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식에 참 열광한다. 예로부터 맛집을 찾아다니는 프로그램은 시청률과 조회수를 보장하는 효자 아이템이었다. 생방송 투데이, VJ 특공대 같은 전통적인 공중파 프로그램들부터, 이제는 유튜브로 옮겨온 풍자의 또간집, 성시경의 먹을텐데 같은 영상들까지. 이런 곳에 한 번 떴다 하면 가게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진풍경이 바로 이런 맛집 프로그램들의 인기를 방증한다.
요리 프로그램은 또 어떠한가. EBS 최고의 요리비결부터, 오늘 뭐 먹지? 같은 레시피를 알려주는 정보성 프로그램부터, 쇼가 가미된 JTBC의 냉장고를 부탁해까지. 나는 개인적으로 흑백요리사가 사실상 냉장고를 부탁해의 정신적 계승작이라고까지 생각하는 편이다.
흑백요리사의 인기는 미식에 대한 전국민적 관심을 토대로, 잘 연출된 프로그램이 얼마나 큰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을지를 보여준 사례였다. 미식 사업을 하면서도 최고의 방송 엔터테이너로 활약하고 있는 백종원과, 우리나라에 현재 단 한 명 밖에 없다는 미슐랭 3스타 셰프의 조합. 그리고 ‘저 사람이 왜 여기에 나와?’할 수밖에 없었던 흑백요리사 출연자들. 그들이 프로그램 내에서 보이는 요리는 사실상 요리라기 보단 묘기에 가까웠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너무 즐거우면서도 한편으로 ‘내가 하는 건 요리가 아니라 레시피를 충실히 따르는 일종의 기술’ 수준밖에 될 수 없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종종 지인들이 내가 만든 음식 사진들을 보거나 직접 맛볼 때마다 “식당 한 번 해봐라”하는 얘기를 농담 반 진담 반처럼 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과찬이라고 손사래를 치곤 했다. 사실 그 손사래 안에는 일정한 맛을 꾸준히 낼 수 있는 레시피 표준화의 어려움이랄지, 내가 하는 건 요리가 아니라 그저 잘 만들어진 레시피를 따라 하는 조리 혹은 테크닉의 영역에 불과하달지 하는 복잡한 설명들이 모두 생략되어 있었다.
흑백요리사를 본 사람들은 모두들 느꼈겠지만, 요리의 본질은 창의성이다.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능숙하게 레시피를 따라 하는 것 만으로는 요리사라고 부를 수 없다.
제주에 살던 어느 날, 친했던 후배 하나가 제주에 놀러 온 일이 있었다. 모두들 숙소에서 얼큰하게 취해가던 중, 후배에게 요리를 하나 부탁했다. 평소 요리를 잘하던 친구라고 알고 있었고, 그날은 뭔가 다들 취해서 그런 무례할 수도 있는 부탁을 스스럼없이 했던 것 같다.
그 후배는 그 자리에서 냉장고를 열어 보더니, 새우와 베이컨, 그리고 블루베리 등을 꺼냈다. 새우와 블루베리 그리고 베이컨. 내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재료들의 조합이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이 말도 안 되는 재료들을 조합하더니 뚝딱 하고 요리를 완성했다. 그리고 반신반의하며 한 입 먹었을 때, 나는 요리란 창의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맛을 보고 놀란 내가 어떻게 한 거냐고 물어보자, 후배는 웃으며 말했다. “형, 이 요리의 킥은 타바스코예요.”
블루베리와 새우, 베이컨, 그리고 타바스코 소스. 내가 처음으로 나는 요리를 잘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잘 흉내 내는 사람일 뿐이란 걸 깨닫게 한 계기였다.
내가 아는 레시피는 몇 개나 될까? 많이 쳐 줘봐야 한 2백 개쯤 될까? 흑백요리사에도 나왔던 승우아빠는 요리사들이 보통 레시피를 아주 어림잡아 한 천 개 정도 알고 있을 거라고 했다. 이 말은 본인이 이제 더 이상은 요리 레시피를 올리는 유튜브 영상을 하지 않겠다며 한 말이었지만, 나는 여기서 또 많은 걸 느꼈다.
앞서 요리가 창의력의 영역이라고 했지만, 모두가 그런 엄청난 재능을 갖고 요리사라는 직업에 뛰어들진 않을 테다. 아마도 누군가는 재능의 영역으로 적은 레시피를 갖고 대단한 요리를 창작해 내며 내놓겠지만, 대다수는 내가 갖고 있는 레시피를 바탕으로 부던한 노력을 통해 베리에이션하며 요리사라는 직업을 하고 있을 테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도 이번 흑백요리사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일종의 벽을 느꼈다. 과연 내가 저기 나가서 다섯 번 연속으로 다른 레시피의 두부요리를 선보이는 일을 할 수 있을까? 갑작스럽게 주어진 홍어를 갖고 내가 무슨 레시피를 할 수 있을까? 이건 경험의 영역이면서도 노력의 영역이자 번뜩이는 창의력의 영역인 것이다.
주절주절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결론은 흑백요리사를 보며 다시금 요리사들에 대한 존경심을 느꼈다는 점이다. 요 근래엔 뭔가 도전할 만큼의 요리나 레시피를 하기보단 그저 한 끼 한 끼 때우기 위한 음식을 만들었는데, 이 프로그램을 보며 조만간에 또 요리를 하며 느끼는 그 즐거움을 다시 한번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오랜만에 열광하며 본 프로그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