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욱 Nov 29. 2020

외할머니의 장 김치

엄마는 종종 식탁에서 돌아가신 외할머니에 대한 얘기를 하곤 했다. 서울에서 양장점을 하시다가 6.25 때 피난을 떠난 뒤, 다시 서울로 돌아와 힘든 시기를 지나며 엄마와 이모들을 키워내신 외할머니. 엄마와 내 손재주는 양장점을 하셨던 외할머니를 닮은 것이라는 이야기들.


엄마는 가끔 외할머니께서 살아계셨을 때 지니셨던 삶의 태도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대표적인 것이 ‘양반’으로서의 자세였다. 외할머니는 전주 이 씨 가문의 후손이셨다. 뭐 요즘에야 가문 따지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으며, 전주 이 씨라고 다 조선 왕실의 후손인 것은 아니겠으나, 외할머니는 대한민국의 근-본이라 부를 수 있는 전주 이 씨 가문에 대해 많은 자부심을 갖고 계셨다는 얘기를 불과 얼마 전에 전해 들었다. 이건 나도 처음 듣는 얘기라서 상당히 흥미로웠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장 김치’라는 궁중 김치에 대한 일화였다.

외할머니에게는 외할아버지 생신이나 명절처럼 특별한 날에만 담가 먹는 김치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간장으로 양념을 한 장 김치였다. 장 김치는 우리가 흔히 아는 지금의 김치와는 개념 자체가 많이 다른 음식이다. 고춧가루, 젓갈은 물론이고 소금도 넣지 않은 채 간장과 설탕으로만 간을 하는 김치로, 여기엔 밤과 잣, 표고와 석이버섯, 배 등의 귀한 식재료들이 들어간다. 때문에 일반적인 서민들이 쉽게 담가먹을 수 없는 김치였고, 왕실에서나 즐겨 먹을 수 있는 김치였다. 장 김치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어릴 적 듣던 흥미로운 동화처럼 느껴졌는데, 문득 엄마와 함께 외할머니의 장 김치를 재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인터넷의 발달 덕분에 금방 몇몇의 레시피를 구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블로그가 아닌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같은 곳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레시피였다. 오히려 이 덕분에 레시피의 난이도가 내려갔는데, 온갖 블로그의 난잡한 정보들로 인한 노이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다수의 레시피가 비슷비슷한 양과 순서, 재료를 말하고 있었다. 엄마의 기억과 인터넷 검색을 찾아 레시피를 정리 한 나는 엄마와 함께 외할머니의 장 김치를 재현해냈다. 석이버섯은 구하기가 쉽지 않아 레시피에서 빼버렸지만, 아무튼.

엄마는 옛날에 외할머니께서 해주셨던 그 맛과 비슷하다고 신기해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맛이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도 배춧잎을 하나 들어 먹어봤는데, 젓갈이 들어가지 않아 맛이 깔끔한 것이 이 장 김치의 가장 큰 특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달짝지근한 맛이 나면서도 자극적이지 않아서, 어린 아이나 식이를 조절해야 하는 사람들이 먹기에도 좋을 법한 김치다. 레시피만 있다면 만들기가 번거롭지 않으나, 한꺼번에 많이 만들어두고 먹을 수 있는 김치가 아닌 만큼 먹고 싶을 때만 딱 만들어둬야 한다는 점은 다소 귀찮을 수도 있겠다.


마침 내 생일이었던 오늘, 엄마와 함께 외할머니의 장 김치를 만들어 먹으며 함께 엄마의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에게 조금이나마 추억을 선물한 날이 되었기를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