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의 질긴 연애가 끝났다. 피터지게 싸웠고 울고 웃었으며 내가 사라지는 기분이 들면서도 헌신했다. 퇴근하고 침대에 누우면 공허함이 몰려왔고 불면에 시달렸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되지?라는 의문이 생겼고, 바람만 불어도 쓰러지는 나에서 탈피하고 싶었다.
어려 보이는 외모, 작은 체구, 무시당할 만한 요소는 모두 갖춘 탓에 인간관계에서 만만하게 보는 경우가 많았다. 단단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고, 존중받고 싶었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곱씹어서 생각하고 상처받는 일들이 지겨웠다.
겉모습으로 평가받고 싶지 않았다. 무엇이라도 머릿속에 집어넣고 배움에 투자한다면 무엇보다 손해 보는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생 때부터 도서관 가길 좋아했고, 다양한 책을 읽으며 성장했던 기억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학생처럼 독서하고 싶었다.
평소 좋아했던 작가님의 동서양 철학강의와, 필사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월세살이 청년에게 강연비는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었다. 비싼 음식, 예쁜 옷, 명품백을 사고 싶은 욕망을 꾹꾹 눌러야만 했다. 토요일 근무날에도 강의를 듣고 싶어 양해를 구하고 연차를 썼다. 저녁이 되면 노트와 볼펜 한 자루를 들고 필사를 했다.
연애도 실패, 일도 만족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글쓰는 자유로움이 좋았다. 쉬는 시간에도 펜을 놓치지 않았다. 에픽테토스, 몽테뉴, 공자, 플라톤, 어려운 철학자들의 말이 이해가지 않아 머리 깨지는 줄 알았지만 고독한 시간 덕분에 어두운 터널을 지나갈 수 있었다. 비수 꽂히는 문장이 훅 파고들때면 노트가 젖기도 하고, 화가 잔뜩 쌓이는 날에는 욕을 한 바가지 쏟아 낼 때도 있었다. 세 번의 사계절이 지났다. 희로애락이 담긴 필사노트도 여러 권이 쌓였다.
독서에 정신없이 빠져들 때도 있었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싶은 유혹도 분명 있었다. 그때마다 작가님은 현지님 5년만 딱 집중해서 독서 하세요 모든 것이 부록처럼 따라올 겁니다. 지금이 황금기예요 60대 되면 하고 싶어도 못해요. 공부가 재밌으면 계속해야죠 라고 말했다.
매일 독서할 분량을 정해 커뮤니티에 느낀 점을 공유했다. 작가님의 쓴소리도 도움이 됐지만, 같이 활동하던 회원들의 응원이 나에게 위로가 됐다. 40대 한 회원님은 육아와 엄마의 삶에 대한 글을 남기셨던 분이었다. 어느날, 엎뒤락 뒤치락 파도처럼 휘청거리는 내 글을 유심히 보시고는 묵직한 댓글 한 줄을 남기셨다. 현지님, 30대는 가슴에 별을 꽂고 살게 될 겁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방황하고 아픈 시절을 통과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어른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가슴 안에 블랙홀이 떡하니 박혀있어 무기력함과 불안을 달고 살았는데, 다시 그 자리가 반짝거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뭐든 겉이 번지르르한 것을 보고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 완전한 실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에픽테토스-
남들에게 근사해 보이고 싶은 마음에 저질렀던 실수가 떠오른다. 필라테스 강사가 되고 싶어서 300만 원 투자했다가 내 길이 아닌 것 같아서 포기하고, 영어도 배우다가 말고, 헬스장도 1년 끊고 한 달 이상 다녀본 적이 없다.
20대 내내 자질구레했던 실패와 몸부림으로 인한 상흔들이 흉터로 남아있다. 인생에서 위기는 누구에게나 오기마련이다. 내 안에 숨은 보석은 고통스러울 때 굴려지고 다듬어지면서 빛을 발하게 된다. 에픽테토스의 말처럼 겉이 드러난 모습에 속지 않고 그 실체를 분별할 수 있는 어른, 누군가에게 적절한 충고와 격려의 말을 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