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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죽음이 또한 이렇게 즐겁기를, 가능하다면 삶조차도

<산오구 : 극락행 완행열차> 2025년 11월 9일(일)

by aboutjina

요즘 내 내면을 지배하는 문장이 있다. 조현설 교수의 『신탁 콤플렉스』에서 만난 다음의 구절이다.

우리 전통문화에서 신은 상수가 아니라 변수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 문장은 신(神)이 한국 사상과 문화에서 어떤 위상을 갖는가를 묻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질문을 나 개인에게로 되돌려, ‘나에게서 신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성찰로 이끈다. 내가 오래도록 믿어온 신의 형상, 그리고 그 존재를 향한 의례적 실천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다시 바라보게 된다. 신을 ‘변수’로 보는 관점은 한국 무속의 세계관과 직결된다. 신은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필요와 순간에 맞춰 개입하는 존재이며, 한국 무속의 세계에서는 이 지점에서 산자와 죽은자가 단절되지 않고 서로의 결을 비추며 맞닿는다.


하지만 이 질문이 나를 어떤 확고한 결론으로 이끈 것은 아니다. 지금의 나는 삶과 죽음 모두 본질적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 삶은 우연히 주어졌고, 죽음은 누구나 동일하게 맞이하는 결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삶이라는 과제를 묵묵히 수행한다. 이 사유의 흐름 속에서 나는 서울 성수동에서 펼쳐진 <산오구 : 극락행 완행열차>를 찾았다. 삶과 죽음 그리고 신의 의미가 흔들리는 시기에 이 공연은 내가 마주한 질문들을 구체적 장면으로 끌어내는 장소처럼 느껴졌다. 이곳에서 죽음은 관념이 아니라 하나의 체험으로 다가왔다.


‘산오구굿’은 살아 있는 개인이나 집단이 스스로의 삶을 정리하며, 생전에 미리 치르는 굿이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다가올 마지막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마음을 편안히 하기 위한 의례인 것이다. 방지원은 팸플릿에 이렇게 적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얼마나 얇은지 날마다 체감하게 된다. 우리는 때때로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자각 속에서 버틴다. 그렇기에 위로가 필요한 것은 망자만이 아니다. 망자를 떠나보낸 이들, 살아남은 이들 역시 깊은 위로를 필요로 한다.

이번 공연에서는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않고, 경계 없이 모두를 위로한다. 살아 있는 이들은 죽음을 미리 맞이하고, 굿판에 모인 모두와 복과 공덕을 나누며, 삶과 죽음을 함께 사유한다. 공연은 이렇게 내가 붙들고 있던 실존적 사유, 즉 삶과 죽음의 무의미성과 부딪히면서도 새로운 감각과 느낌을 선사한다.

전시 <극락전>과 <시왕도> © 안재경

공간은 전시장과 무대로 나뉘어 있다. 2층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평소 관념으로만 떠올리던 죽음이 눈앞에서 형태를 갖춘 듯한 느낌을 받는다. 죽음을 실체로 확인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명(命)을 다한 육체이며, 다른 하나는 쓰임을 다한 명(名)이다. 이곳 <극락전>에서는 위패에 새겨진 이름을 통해, 관념 속에 머물던 죽음을 시각적 실체로 체감할 수 있다. <극락전> 위에는 죽은 자와 산자의 위패가 놓이고, 열 명의 심판관(시왕十王)이 이를 둘러싼다. 망자들은 전생의 업보를 지닌 채 심판관 앞에 서고, 나는 그 장면을 마주하는 동안 자연스레 스스로의 삶과 죄를 돌아보게 된다.


<극락전>과 <시왕도>를 지나 <달 울리기>에 이르면, 향냄새가 가득한 공간에 징과 꽹과리로 만들어진 열세 개의 달이 떠 있는 장면과 마주한다. 열두 달에 윤달을 더해 순환의 질서를 형상화한 이 작품은, 의미를 덧붙이지 않더라도 완결된 조형성을 갖춘다. 굿 무대가 펼쳐지는 차안(此岸)을 발아래에 두고 피안(彼岸)의 공간에서 순환하는 시간을 감각하는 경험은 그 자체로 신성함을 환기한다. 자연스럽게 고대 이집트의 시간 개념이 떠오른다. 이집트인들은 시간을 단일한 관념으로 정의하지 않고 ‘네헤흐’(neheh)‘와 ‘제트’(djet)‘라는 두 축으로 이해했다. 전자는 끊임없이 되돌아오며 생을 갱신하는 반복의 시간이며, 후자는 완전한 상태가 변치 않고 지속되는 정지된 영원의 차원이다. 두 시간은 반복이 정지를 활성화하고, 정지가 반복을 안정시키는 구조 속에서 상호 의존적 관계를 이룬다. 이집트인들이 일출을 두 속성이 가장 선명하게 교차하는 자연현상으로 본 것도 이러한 구조적 사고에 기반한다. 일출이 반복의 운동과 동일한 형상의 지속을 동시에 보여주듯, <달 울리기>가 제시하는 열세 개의 달 역시 순환과 영속이라는 두 시간축이 만나는 지점을 시각화한다.


1층 무대로 내려오면 전혀 다른 리듬의 세계가 펼쳐진다. 굿은 이미 한창이며, 발 디딜 곳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찬 관객석은 초반의 경직된 분위기에서 서서히 이완된다. 공연 시작 전, 방지원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연출적으로 가짜돈을 관객들에게 제공했고, 관객들은 이를 무대 위 무녀와 악사에게 꽂아주며 굿의 정서와 문법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이는 전통 굿에서 오래도록 이어져 온 의례적 관습이다. 흥미로운 것은, 한때 이 행위가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나조차 이제는 이를 너무도 자연스러운 풍경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굿의 정서를 직접 설명하거나 제시하지 않고, 반복적 행위와 관객 참여를 통해 점차 스며들도록 한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적응이 아니라 방지원이 자신의 작업을 통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감응의 결과라 할 수 있다.

© 안재경

진짜 ‘무당’들이 무대 위에 존재감을 드러낸다. 방지원을 필두로 늘 함께하는 민경문이 그러하며, 이번 공연에서는 몇몇 눈에 띄는 젊은 연주자들의 활약도 주목할 만하다. 요즘 다양한 무대에서 기량을 발휘하고 있는 차루빈과, 동해안 가락을 충실히 연주한 강경훈 또한 예상치 못한 성취를 보여주었다. 동해안 무속 음악은 본래 높은 연주력을 요구하는 음악이다. 완벽한 연주를 기대한 관객에게는 다소 아쉬움이 있을 수 있으나, 연주에는 약간의 어긋남과 투박함이 존재했음에도 절차에 충실하며 행복하게 연주하는 연주자들의 모습에서 ‘정형화된 완벽함’을 요구하는 잣대는 불필요하다. 오히려 이러한 작은 어긋남은 적막 속에서 숨조차 내기 힘든 공연장과 달리, 관객에게 크나큰 자유로움을 선사한다.


공연은 쉼 없이 몰아쳤고 제한된 공간에서 진행되며 작은 실수가 종종 이어졌지만, 이는 오히려 현장의 생동감과 즉흥적 긴장을 또렷하게 부각했다. 전통 오구굿의 무가들이 충실히 이어지는 가운데, 사이사이에 삽입된 재치 있는 창작무대는 호흡의 변화를 만들어낸다. <산오구 문답>과 <오구곤반>처럼 과하게 서술적일 수 있는 요소들은 문답과 유희를 통해 굿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이처럼 관객을 웃기고 울리며 감정의 진폭을 넓히는 구성은 굿이 지닌 정서적 밀도와 극적 역동성을 현대적 무대 위에서 작동시킨다. 결국 관객은 굿의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로 자리하게 된다.


이번 공연에서 특히 눈에 띄는 지점은, 굿이 본래 지닌 언어 중심적 서사 구조를 무성적 표현으로 전환한 연출이다. 전통 굿에서 언어는 서사의 뼈대를 이루지만, 현대 관객에게는 그 장벽이 때로는 넘어서기 어려운 문턱이 된다. 공연은 이를 과감히 돌파하며, 두 연희자가 거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춤을 추거나, 서로의 그림자가 되어 등을 맞대고 움직이는 장면을 보여준다. 어떠한 언어적 설명 없이도 서로가 서로가 되는 순간은, 산자와 죽은자가 동일한 공간에서 공존함을 직관적으로 체감하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무성적 표현 속에서 연희자들이 단순한 퍼포머가 아니라 ‘신적 존재’에 가까운 감응의 매개자로 느껴진다는 점이다. 서두에서 언급했듯, 그들은 초월적 존재로 군림하는 신이 아니라, 차안(此岸)에 머물며 관객과 숨결을 교환하는 ‘변수적 신성’의 형태로 다가왔다.

조상굿 © 안재경

이 체험은 내 마음속에서 작은 촉매처럼 작동했다. 삶과 죽음, 신과 인간, 웃음과 신성의 교차를 몸으로 느끼며, 나는 아직 시도하지 않은 일, 나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 사유의 흐름 속에서, 아직 공개하지 않은 내년의 다짐 중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매일 유언을 작성해 보겠다는 계획이다. <산오구 : 극락행 완행열차>는 마치 신이 나에게 지금 당장 그 계획을 실천하라는 듯, 나를 그곳으로 부드럽게 인도하는 듯했다. 물론 이 결심 역시 언제 또 다른 ‘변수’로 달라질지 모르지만, 그때까지만은 이 사유의 흐름을 계속 이어가고자 한다.


마지막에 이르러 주인공 ‘방지원’에 대한 간략한 소회를 남긴다. 그는 늘 영리하고 기발한 연주자이며, 죽음과 가까이 서 있으면서도 그 누구보다 살아 있는 연주를 펼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도심 한복판에서 굿판을 열어 관객을 굿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그의 연구와 성찰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도시적 세련미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는 그의 예술 속에서, 나는 오히려 원초적인 울림과 힘을 느낀다. 삶과 무대가 닮은 그의 태도는 그 아름다움을 한층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나는 그가 앞으로도 이러한 본질적 소리와 감각 속으로 깊이 들어가 더욱 고뇌하며 사유하기를 바란다. 그 과정을 거쳐 ‘청년’이라는 수식어를 벗고, 단지 예술가로서 굿과 음악의 중심에 서 있는 방지원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연주자 방지원 © 안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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