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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y Dec 25. 2020

나의 롬복

영혼은 낙타의 속도로 걷는다

 





매일 밤 꿈을 꾼다.

꿈속의 나는 자유롭게 헤엄친다. 햇살이 반짝이는 바다는 실크처럼 매끄럽고 따뜻하다. 내 몸보다 훨씬 큰 거북이는 태평하게 산호초를 뜯어먹고, 이름 모를 물고기들은 소풍이라도 나온 듯 무리 지어 돌아다닌다. 나는 어쩌면 ‘니모’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에 그들 뒤를 따라다니며 한동안 물속을 탐험한다.


매일 밤 꿈을 꾼다.

꿈속의 나는 친구들과 함께 파도타기를 한다. 그들은 앞으로 가지 못 한 채 보드 위에 둥둥 떠 있는 어색한 내 모습을 놀리지만 걸음마 떼는 아이를 도와주는 엄마처럼 다정하게 나를 파도 가까이까지 이끌어준다. 친구들은 “패들! 패들링 해! 일어나! 지금이야! 앞을 봐야지!” 소리치다가도, 파도를 기다릴 땐 어떤 자세를 취해야 편안한지, 보드의 방향을 바꾸고 싶을 땐 어디를 바라봐야 하는지 같은 것들을 족집게 과외선생님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알려준다. 하지만 큰 파도가 오면 번번이 고꾸라지는 날 버려두고 보란 듯이 소리를 지르며 파도를 타러 떠난다. 그 뒷모습이 조금은 (사실은 많이) 얄미울 때도 있지만 물미역이 되어 바다에서 건져진 나에게 “Never give up!!” 외치며 아이스크림을 건네주는,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친구들이다.


매일 밤 꿈을 꾼다.

꿈속의 나는 친구의 엄마가, 아니, 이제는 나의 엄마도 되어버린 그녀가 차려주는 밥을 먹는다. 갓 지은 쌀밥과, 새벽에 직접 잡아온 싱싱한 참치를 숯불에 노릇하게 구워내 토마토와 고추, 레몬을 함께 으깨 만든 전통 소스에 찍어 먹는다. 체면은 젓가락과 함께 치워버리고 어린아이처럼 입과 인중에 숯 검댕을 묻히면서 와구와구 먹는다. 그러다 가끔 “Mai!(맛있어요)” 말하며 쌍 따봉을 들어 올리면 엄마는 세월이 만든 주름이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눈빛으로 나를 쓰다듬는다.    


매일 밤 나는 꿈을 꾼다.

꿈속의 나는 해변을 걷는다. 부드러운 모래일 때도 있고 도저히 맨발로는 걸을 수 없을 만큼 큰 산호를 밟을 때도 있다. 가끔 멈춰 서서 조개를 줍거나 발가락 사이를 스치는 정체 모를 작은 생물들을 손등 위에 올려본다. 오늘의 할 일을 마친 태양이 퇴근 준비를 할 때쯤 하늘은 조금씩 색을 바꿔나간다. 파란 물통에 빨갛고 노란 물감이 떨어져 번지는 것처럼 천천히 물든다. 태양이 떠난 자리를 달이 대신하면 까만 밤이 찾아온다. 나는 차갑게 식은 해변에 앉아 밤하늘을 바라본다. 머리 위엔 서울의 야경보다 선명한 수많은 별이 반짝인다. 분명 별자리인 것 같긴 한데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제일 쉬운 북두칠성을 짚어본다. 어둠은 빛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기꺼이 자신을 내어준다. 하루 종일 나를 감싸주던 바다는 오로지 소리가 되어 귓속으로 들어온다.           




매일 아침 꿈에서 깨어난다.

꿈 밖의 나는 폭신한 침대에서 눈을 뜨고, 보송보송한 이불을 정리하고, 창문을 열고 상쾌한 바람을 맞는다. 옷장을 뒤지며 좋아하는 옷들을 꺼내 입고, 반가운 친구들을 만난다. 서점에서 책을 사고, 보고 싶었던 영화를 찾아본다. 엄마가 해주는 얼큰한 닭볶음탕을 먹고, 벚꽃을 구경하고 자전거도 탄다.


하지만 밤이 되면 난 다시 꿈을 꾼다. 내 영혼은 여전히 그곳에 있는 것처럼.           


영혼은 낙타의 속도로 걷는다는 말을 본 적이 있다. 우리의 몸은 바쁘게 앞으로 나아가지만 미처 몸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 한 영혼은 여전히 기억 속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 몸은 이곳에 와 있지만 영혼은 여전히 '롬복'에서의 행복했던 시간들 어딘가를 떠돌고 있는 것만 같다. 영혼은 몸이 일상의 편안함에 익숙해지는 것을 방해라도 하는 듯 매일 밤 꿈속으로 찾아와 나를 그때의 기억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바스러질 듯한 태양빛을 받으며 온몸으로 웃던 그때의 내 모습을 보여준다.


영혼은 말한다. 부디 이 기억을 창 하나 없는 깊숙한 마음에 묻어두지 말라고.


부디 이곳을 잊지 말아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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