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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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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y Dec 25. 2020

이월의 발리

비가 갠 뒤 우붓에서






이월의 발리엔 매일 비가 내린다.

도착한 첫날에도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쏟아졌다. 작은 물방울이었던 비는 갑자기 폭우로 변하더니 잔뜩 파인 길을 순식간에 물웅덩이로 만들어버렸다. 몹시 곤란했다. 제대로 된 인도도 없는 좁은 골목길을 천둥번개가 치는 비를 뚫고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숙소까지 가려면 최소 십오 분은 더 뛰어가야 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좁은 처마 밑으로 들어가 잠시 몸을 피했다. 그곳엔 이미 나보다도 먼저 도착한 작은 체구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검은 피부와 대비되는 백발머리의 노인이었다.                         


그는 그들의 언어로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당연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손짓을 보니 그쪽은 비가 떨어지니까 자신의 옆, 그러니까 처마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한 발 뒤로 가서 섰다. 노인은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쉬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 내 얼굴까지 올라오는 연기 때문에 코가 매웠지만 왠지 내색할 수 없었다. 노인은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작은 몸을 눈에 띌 정도로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 가끔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곳에서 비를 피한지도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다. 비는 여전히 그칠 기미가 없었다. 나는 결국 노인의 한 발자국 옆에 쪼그려 앉았다. 이번엔 그가 내뿜는 강한 연기가 내 눈을 찔러왔다.

그렇게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호스텔 주인인 '아익(Ayik)'이 스쿠터를 몰고 나를 데리러 와 주었다. 나는 아익이 가져온 찢어진 우비를 입고 그녀의 뒷자리에 올라탔다. 출발하기 전, 노인에게 손을 좌우로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 역시 내게 손 흔들어 주었다.


어느새 빗줄기는 약해져 있었다. 매콤한 연기가 사라진 그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절대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비도 언젠가는.......




내가 한국을 떠나온 이유는 외로움 때문이었다.

그곳에선 마음껏 울 수도 없었다. 눈물도 눈치가 보였다.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혹여나 상처가 될까 봐 울음이 차올라도 꾹 누르며 애써 괜찮은 척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혼자가 될 때면 마음에 시린 바람이 불었다. 어떻게든 나라는 사람을 어디든 데려다 놓지 않으면 깊은 감정 속으로 침전될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래서 택한 곳이 발리였다. 신을 섬기는 나라. 서핑을 할 수 있는 바다와, 자연 속에서 요가를 배울 수 있는 나라. 다양한 비건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많은 식당들이 한 걸음 떼기 무섭게 나타나는 나라.


발리에 오지 않을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다음 날, 정말이지 오랜만에 새벽녘의 우렁찬 닭 울음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비비며 커튼을 걷자마자 아침 햇살이 방안 한쪽 벽을 가득 채운 통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두렵고 낯설었던 어제와는 정반대 발리의 모습이었다.


하루 종일 친절했던 가이드가 깜깜한 밤이 되자 별안간 집으로 가는 차를 돌려 술집으로 데려가 술 한잔만 하자며 우기던 순간. 잔뜩 긴장한 채로 집으로 돌아와 깜깜한 방의 불을 혼자 켜야만 했던 순간. 큰 침대가 유난히 더 크게 느껴져 외로웠던 순간. 많은 관광객과 호객꾼에게 치여 길 잃은 아이가 된 것만 같았던 순간들까지.


따뜻하게 얼굴을 만져주는 햇살을 받으며 어제의 곤혹스러움이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비가 그친 오늘 아침처럼 내 마음도 깨끗해지기를...          


자 그럼 이제 문 밖으로 나가볼까?




방에서 바라본 아침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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