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아끼느라 분주했던 삶에서 놓친 것들
난 항상 빨리 씻는다.
늦잠을 잔 날에는 10분 만에 급하게 대충 씻고
저녁에 돌아와서도 20분 정도면 넉넉히 씻는다.
나에게 씻는다는 건 어떤 의미였냐면
늘 시간에 쫓기면서 살아가는 삶의 일부였다.
그동안 그렇게 해왔고 남들도 다 이렇게 하니까.
딱 위생관리의 차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무언가를 해치우듯 일종의 소모적인 시간이었다.
내 동생은 오래 씻는다.
짧으면 30분, 길면 1시간 동안 씻을 때도 있다.
엄마는 보일러 요금 많이 나온다고 타박을 했고
나는 군대 다녀온 것 맞냐면서 잔소리를 했다.
간혹 답답한 마음에 뭐 이리 오래 걸리냐 물으면
자기는 아무렴 여유롭게 씻는 편이 좋다고 했다.
그래, 좋겠지.
밖에서 화장실 기다리는 심정은 잘 모를 테지만.
독립해서 이사를 하면서 욕실이 여유로워졌다.
내가 씻는 시간은 여전히 변함없이 짧았기에
하루에 23시간 정도는 텅 비어있는 셈이었다.
어느 날, 지난밤에 과음한 탓인지 일찍 깨어서
샤워도 미처 못하고서 잠들었던 몸이 찝찝했다.
이제 딱히 눈치 보거나 잔소리할 사람도 없어서
오늘만큼은 온수 콸콸 틀어놓고 여유롭게 씻자!
내 동생처럼 시간에 쫓기지 말고 씻자 생각했다.
습관이 참 무서운 것이 20분 만에 할 게 없었다.
그래도 그냥 샤워기를 틀어놓고 씻는 척을 했다.
그런데 그 시간부터 나는 참 신기한 경험을 했다.
많은 생각이 순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더라.
그 생각은 내가 평소에 고민했던 일이기도 했고
바쁘게 살면서 잠시 잊고 있던 일이기도 했으며
그 생각들을 나열하고 정리하게 되는 것이었다.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고 정리되는 듯 보였지만
사실 생각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많았다.
그럼에도 마치 머릿속 '생각의 거울'을 마주한 듯
막연하기만 했던 고민과 중압감이 가라앉았다.
군대에서 경계근무를 서던 밤 생각이 많아지던
병원에서 입원했을 때 하루 종일 생각에 잠기던
여행을 떠나는 기차에서 잠들기 전까지 느끼던
나 자신을 한 걸음 더 멀어져서 바라보게 되는
고요하지만 초월적이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늘 평일 아침에 일어나서 바쁘게 준비할 때면
씻는 내내 욕실 시계를 보며 마음 졸였었는데
무언가 쫓길 일도 없으니 마음도 내내 편안했다.
결국 1시간을 거진 채워서 나온 나는 어땠을까?
그 시간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지나온 듯했다.
비로소 그때 동생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단지 게을러서 그렇게 오래 걸린 것이 아니라
바쁘게 살면서 놓치고 잊던 생각의 묵은 때를
그 시간 흘려버리고 씻어내었던 것이 아닐까.
살면서 가끔씩은,
한 시간 동안 씻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