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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공원 Jun 25. 2022

착각



강남은 정신을 잃고 싶을 때 오기 좋은 도시였다. 물론 굽이굽이 언덕을 오르면 어느새 조용한 주거단지가 정갈하게 모여 있지만, 기억에 한에 무척 방황했던 도시이다. 문래에서 출발하면 신 논현까지 45분 남짓으로 도착할 수 있고, 어느 곳에서 출발하든 출퇴근 시간과 닿으면 택시는 더 느린 알리송한 도시 강남.


진에게 연락하면 언제든 길을 찾아 주었다. 내가 유일하게 진에게 기대 왔던 이유이기도 했고, 그 외의 자잘한 마음을 주고받기도 했지만 미끄러져 내렸던 것에는 그만의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진에게서 홍대에서 연남동으로 가는 길, 명동성당을 빨리 찾아가는 법, 구반포에서 사평역을 걸어갈 수 있다는 등의 단순한 로직까지 수화기 넘어 전해 들으며 서울에서 자랐다. 자잘한 마음이라 치부할 수밖에 없었던 건 보통의 패기 넘치는 남자와는 다르게 여성호르몬이 많고, 수줍음이 많다는 게 그의 성향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선을 보기 전에 진에게 진지하게 의사를 물어본 적이 있었지만 역시 그는 어떤 자신만의 사정이 있어 보였기에 늘 나는 진에게 안부 없이 급작스레 길을 물었다.


진과 완전히 헤어진 후에는 일 년에 한두 번쯤 안부를 묻는 사이로 지냈다. 나는 생에 일정 속도대로 해야 할 업무들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고 그곳에 집중해 있었다. 그는 내인생에서 사라져 없는 사람이 될쯔음 안부를 물었다. 안부에 형식이 실리면 의미 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편이어서 나중에는 그의 안부에 답변을 하지 않았게 되었다.


인생의 어떤 구간에서는 안부라는 형식이 끼어들 틈 없이 바쁘기만 한 구간도 많았다. 계속 발을 쉼 없이 구르는데 자꾸만 어두운 곳에서 발목을 잡아 끌어내리기도 하니까 나는 여기가 어디쯤인지 모르는 공포감을 가지고 발을 구르는 것 밖에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해가 쌓일수록 진의 안부가 스팸으로 인식되곤 했는데, 그날은 늘 그저 그런 생일 축하해, 잘 지내? 뒤에 또 다른 글자들이 연속해 도착했다. 그러지 말고 이번에 꼭 한 번 보자. 정말 이번 주에 보자. 그 글자들이 그날따라 슬퍼 보였고 슬픔과 스팸의 번뇌를 오고 가는 사이 한 번 더 메시지가 쌓였다.

'목요일은 어때?'


다급해 보이는 그를 강남에서 다시 만났다. 잘 지냈냐는 인사가 무색하게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너무 어른이 되어 있었고, 피가 두꺼운 만두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말들을 자주 늘어놓았다. 그런데도 눈빛이나 어투 자세 같은 진의 익숙한 추임새들이 마음을 놓게 했다.


진은 내가 나온 것에 대해 무척 신기 해하는 것 같았지만, 우리는 별 시답지 않은 말들만 늘어놓으며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커피를 마실수록 입이 말라할 말은 점점 줄었다.


진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휴가 때 불러서 수다 떨 사람. 어릴 때 친구처럼 늘 그대로 불러도 좋은 사람. 혹은 스팸문자를 정기적으로 보내다 걸려든 나이타이밍의 여자. 어쨌거나 진은 내게 조금 아픈 부분이었다. 가만히 오래 들여다보면 철보다 멋이 든 동생 같기도 하고 좋은 여자를 만나면 참 좋겠다. 하는 처연함도 가끔 들게 하는 사람.


이 관계를 나는 지인이라 다시 규정했지만 그는 매 순간 아니었음을, 그리고 도착했을 많은 문자 속 여자들 또한 매 순간 여자였음을 이제는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여성호르몬보다는 남성호르몬이 무척 발달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그러므로 스팸이 되었던 사람의 부름에 달려 나간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이날을 통해 그의 모호한 인생의 원인을 조금은 더 알게 되었다.


언젠가 그에게 행선지나 목적지가 분명해졌으면 좋겠다. 여러 과거를 쥐고 강남에 머무는 이가 아닌 행선지 있는 누군가와 함께 구르는 아픔과 기쁨을 맛보길... 진, 이란 이름은 그런 아쉬움으로 내 속에 살고 있다.


어쩌다 보니 강남에서 당근주스를 마시고 다른 지인을 기다리고 있다. 조금 더 시간이 남아서 커피를 한잔 더 시켰다. 침샘의 분비보다 빠르게 번복했던 말들. 입이 마르게 했던 수많은 만약과 약속들이 뜨겁게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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