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지 못할지니
기록하지 않는 사람을 싫어한다.
그는 기억을 왜곡하고
결국 말을 바꾼다.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다. 기록하지 않는 습관이 주는 부정적인 삶의 모습을 ‘기록‘해 두려 한다.
모든 것을 기록하고 저장하는 어떤 기록 중독자 같은 삶을 살자는 것은 아니다. 꼭 기록해야 할 것들이 있는데 하지 않음으로 인생에 오점을 남기지 말자는 취지다.
미팅을 하면서 늘 기록을 한다. 중요한 포인트나 요청사항 등은 꼭 메모를 남긴다. 그리고 가급적 빠른 시간 내에 그 메모를 뼈대로 한 회의록을 작성한다. 이것은 첫 직장에서의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많은 회의록들은 귀한 업무 자산이자 기본기가 되어 나를 든든히 도와주었다. 고객과 미팅을 가졌다. 함께 간 주니어 직원이 있었다. 미팅 시간이 한 시간이 훌쩍 넘었고, 그동안 중요한 포인트가 수차례 지나갔지만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고 있었다.
‘기억력이 너무 좋은 건가?’
사람이 자기가 잘 아는 분야를 정말 집중해서 들어도 1시간 분량의 대화에서 요점을 놓치지 않기란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다지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의 대화를 메모 없이 기억할 수 있을지 내심 걱정이 되었다. 회의가 끝난 뒤 밀려오는 꼰대력에 입이 열리고 말았다.
‘A 씨, 오늘 미팅한 내용 간단히 기록해서 요점이랑 우리가 해야 할 아이템 포함되게 출장 보고 올려야 해요.’
‘아. 네…’
아주 미세하게 당황한 듯 한 표정과 큰 문제는 아니라는 표정이 섞여 있었다.
‘잘 기억할 수 있어요? 기록을 안 했던데 ‘
내심 요즘 세대이니까 녹음이라도 했으려나 해서 물어봤다.
‘네. 그러게요. 잘 기억해 봐야죠 ‘
당황스럽긴 하다. 나도 당황하지 않고, 친절함으로 답해준다.
‘내가 기록해 둔 게 있으니까. 필요하면 얘기해요.‘
그러나 여지없이, 중요한 것을 빼놓은 회의록이 작성된다. 한 번의 회의야 좀 잘못되면 어떻겠나 싶지만, 인생에서 중요한 것들이 잘못된다면, 그것이 기록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면,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적어도 다음의 것들은 꼭 기록을 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꼭 기록해야 하는 것들은 잊어버리거나 혼동하면 손해를 보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지극히 주관적 견해)
아이디어는 불청객이다. 오라고 오라고 할 때는 잘 안 오는데, 올 줄 전혀 몰랐을 때 온다. 오죽하면, 화장실에서 떠오른 위대한 아이디어가 그렇게 많다고 하겠는가. 화장실같이 무방비의 상태에서 아이디어가 찾아왔는데 메모할 준비가 안되어 있으면, 보통은 이렇게 생각한다.
‘좀 이따 적어 놓지 뭐.‘
‘다시 생각나겠지 뭐’
그런데 화장실은 원래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달라지는 곳이다. 95% 이상 그 아이디어는 다시 생각이 안 난다. 다시 생각나겠지라고 기대하기엔 아이디어는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뇌의 깊숙한 뉴런들의 상호작용과 예기치 못한 조합에 의한 번뜩이는 전기신호는 다시 만들어지기까지 확률적으로도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똑같은 신호가 아닐 가능성은 거의 100%다.
결론은 언제든지 아이디어가 오시면, 반갑게 맞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준비물은 당연히 메모도구다. 현대인에게는 스마트 폰이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난감한 경우는, 꿈속에서의 계시이다. 꿈에서 이미 느낀다.
‘이거 대박인데, 적어야 하는데’
그렇지만 잠시 눈이 떠진 순간이 운 좋게 왔더라도, 스마트 폰을 켜고 뭔가 적기엔 쉽지 않다. 가장 아쉬운 순간이다. 그래도 몇 번 성공한 기억이 있다. 쓰레기인 적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어찌 됐든 아이디어는 놓치면 손해 보는 최고의 기록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글감이 될 수도 있고, 업무 관련 아이디어, 인간관계에 대한 해답, 종교적 깨달음, 심지어 가구배치 아이디어까지 무엇이 언제 어떻게 올지 예상은 안된다. 랜덤 한 그의 방문을 잘 준비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볼 때, 불만이나 불평은 기록할 필요가 없다. 너무 잘 기억에 남는다. 그 아쉬운 점, 그 섭섭한 점, 그 답답한 점들은 알아서 뇌 속에 장기기억으로 잘 자리 잡는 편이다. 감사는 다르다. 자리를 못 잡는다. 내가 자리를 만들어 줘야만 한다. 뭔가 있었는데 어느새 사라져 있다. 감사한 일이 생각나거든, 감사한 일이 생겼거든 얼른 적어라. 감사는 워낙 능동적인 사유의 과정이어서 그런지 에너지 소모가 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리 뇌는 그것을 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는 것은 인간으로 하지 말아야 할 가장 큰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너무 쉽게 배은망덕해진다. 기억하지 못해서일 때가 많다. 가장 확실한 예는 우리들의 부모님에 대한 감사다.
부모님에 대한 감사를 따로 적어 두는 그런 멋진 사람이 몇% 나 될까?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 부모님과의 감사한 일들(다시 말하지만 불평은 적을 필요 없다)을 기록해 보자. 평범한 부모님의 인생을 그 자식이 아니면 누가 기록하겠나? 나도 기록하지 않으니 잊어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좀 더 확장하면, 우리가 만나는 인간관계 속에서 감사한 일들을 기록해야 한다. 그래야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감사하는 삶을 살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기억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든다.
서두에 얘기한 사례처럼, 중요한 업무 관련 사항은 반드시 기록해야 한다. 시니어 직장인의 경우, 내가 생각할 때 거의 대부분 기록을 잘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내 주변을 봐도 그렇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적응의 결과물이다. 그러니 주니어들에게 부탁한다. 기록하길 부탁한다. 뭘 기록하느냐. 어떻게 기록하느냐는 것은 기록하다 보면 다 틀이 잡히게 되어 있다. 기억력이 좋다고 착각하지 않길 부탁한다. 직장인의 삶이란, 어제 먹은 점심 메뉴도 기억이 안나는 삶이다. 자만하지 말자.
책을 읽다가, 혹은 sns를 돌아다니다가, 혹은 출퇴근 길에 보이는 많은 카피들, 듣고 있던 가사의 한 소절이든, 혹은 누군가에게 들은 말이든, 우리는 이따금 위대한 문장을 만난다.
위대한 문장은 모두가 인정하는 그런 문장일 수도 있고, 나에게만 위대한 문장일 수 또 있다. 그 문장이 나와 어떤 작용을 한 것은 분명 무슨 이유가 존재한다. 그 이유를 당장은 모를 수 있기 때문에, 일단 적어 둬야 한다. 그렇지 않았을 때 흔히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아. 그 뭐 그런 말이 있는데, 그게 뭐였더라?’
‘아 누가 한말인데, 그게 뭐더라?’
누가 한 말인지라도 기억한다면, 어떻게든 찾기 쉬울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다시 만날 때까지 몇 년이 걸릴지 몇 달이 걸릴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돈처럼 중요한 것은 많지 않다. 이 처럼 중요한 것에 관련된 일은 반드시 기록해야 한다. 할 수 있으면 녹음도 해야 한다. 사회생활을 좀 해보면 안다. 이런 것이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지. 의미를 너무 잘 알게 된 사람들은 분명 기록하지 않아서 낭패를 본 사람들일 것이다.
돈과 관련된 일은 특히 사람들이 말을 잘 바꾼다. 그렇기에 기록해야 한다.
세상에는 기록하는 사람과 기록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뉜다.
글치의 첫 출간입니다.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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