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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볕 냄새 Jan 10. 2024

진정한 삶은 어디에 있는 걸까

샘 멘데스, <레볼루셔너리 로드>

한 쌍의 부부가 있다.

남들은 모두 이 부부를 부러워한다.

첫눈에 서로에게 빠져 연애하고 결혼 7년차,

번듯한 동네, 꽤 괜찮은 집에서 살고 있고, 아들 하나 딸 하나, 매력적인 남편과 아내, 휴일이면 정원을 가꾸고 이웃을 초대해 식사를 함께 하는, (TV에서 보던) 1950년대 미국의 전형적인 가정의 모습에 가깝다.


이 가정은 평화롭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부부는 각자, 또 서로 별로인 상태다.

하긴 문제가 없는 듯 보이는 게 더 문제인지도 모르지.


회사원인 남편은 직장일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냥 다닌다. (다들 그렇지 뭐, 미국이라고 다를쏘냐) 같은 회사 여직원과 저녁을 먹고 하룻밤을 보내기도 하면서. 연극 배우인 아내도 현재의 삶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연기도 생각만큼 잘 안되고, 부부 사이도 예전 같지 않고. 자신이 꿈꾸던 삶은 이런 게 아니었다는 생각만 든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연애 시절 남편이 프랑스 파리야말로 살아있는 것 같은 도시였다고 한 이야기를 기억해낸다. 그날 저녁 아내는 남편에게 파리로 떠나 새로운 삶을 살자고 제안한다. 뭘 해서 먹고 사냐는 남편의 질문에 아내는 돈은 자신이 벌테니 당신은 좋아하는 일을 찾으란다. 이러고 살기에 당신은 너무 특별하다는 말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어딘가 석연찮은 기분이 드는 남편. 그러나 생각해보면 자신도 회사가 지겨웠고, 부인의 말처럼 자기 안에 뭔가 특별한 게 있을까 싶기도 했고, 이상하게 들뜬 마음에 다 때려치우고 떠나는데 동조해버렸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이런 의심도 있었다.

정말 나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사람인 걸까,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게 있기는 한 걸까,

파리에 가면 그걸 찾을 수 있을까,

찾는다고 해서 잘 할 수 있을까,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이주를 결정한 후 부부는 기분이 좋아졌다. 꼴보기 싫었던 배우자도 더없이 사랑스럽게 보여 마치 이 이상은 없을 것처럼 열렬히 사랑한다고 느낀다. 아무 걱정 없던 연애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다. 오늘도 뻔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일 걱정을 하는 직장 동료들은 이제 나랑 상관없는 사람처럼 보이고, 이웃을 대할 때도 뭔가 여유가 있다.


저흰 이제 곧 떠날 거에요.

사람은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야죠.


파리에 가면,

그곳에만 가면 진짜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하필 일은 이런 때 터진다. 어째 너무 순조롭다 했지. 아내는 세번째 아이를 임신했고, 남편은 회사에서 인정받으며 더 높은 연봉과 승진을 제안받았다. 아니, 이게 뭐가 문제냐고? 그러게, 평소 같으면 엄청 기뻐해야 할 이 일들이 이들 부부에게는 갈등의 씨앗이 된다. 이제 파리에 갈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결국 남편은 막연하고 불안정한 미래와 자유 대신 보장된 자리와 안정을 택했다.


이 과정에서 부부는 또 세상 이런 원수가 없는 것처럼 죽일듯이 싸우고,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생채기를 낸다.


다른 여자랑 잤어. 회사 직원이야. 하룻밤일뿐이었어.

그러니까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지.

그런 얘길 왜 하는데? 당신이 누구랑 자든 아무 상관 없어!방금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

뭐라고? 그래!! 그 아이 솔직히 나도 원하지 않았어!


영화의 결말은 여느 호러 영화 이상으로 끔찍하다. 아내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이제 현실 세계로 돌아와 모든 것을 받아들인 것처럼 다정한 얼굴로 아침을 준비하고 함께 식사를 한다. 남편이 승진해서 하게 될 일도 물어보고 그를 응원하며 배웅하고, 남편도 아침 정말 맛있었다며 자신을 더 이상 미워하지 않는다는 확인까지 받고 회사로 떠난다. 겉으로 보면 정말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인가 싶은 풍경이다. 그러나 남편이 출근한  뒤 아내는 홀로 뱃속의 아이를 지우고 과다출혈로 결국 사망한다.



그건 너무 비현실적이야.


영화 속에서는 이 대사가 여러 번 등장한다. 아내가 파리행을 제안했을 때 남편의 첫마디도, 이웃에게 이사를 간다고 했을 때 이웃집 부부의 뒷담화도, 결국 파리행이 무산되었을 때 회사 동료들의 위로 아닌 위로도, 아내와의 마지막 아침 식사에서 그녀가 남긴 말도. 모두 그들의 파리행, 정확히 이 나이에 낯선 나라에 가서 새롭게 시작한다는 계획이 너무 비현실적이라는 거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 비현실적인 꿈을 모두가 부러워하고 시기하고 있었다.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를 보냈던 이웃집 여자는 "그건 너무 비현실적인 생각이야."라는 남편의 말을 듣자마자 눈물을 쏟아낸다. 그치? 맞지?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당신이 나랑 같은 생각이라서 다행이야, 라면서 우는 그녀는 모두의 마음 속에 있지만, 자신은 엄두도 못내는 일을 선뜻 하려는 사람에 대한 질투심을 보여준다. 나도 이렇게 애 키우면서 집안일이나 하고 매일 아등바등 살고 싶었던 것은 아닌데, 나도 이렇게 상사 눈치나 보면서 매일 생활비 걱정이나 하고 컴플레인 전화나 받으면서 살고 싶었던 것은 아닌데, 너희는 그렇게 선뜻 떠난다고? 그럴 수 있다고? 여기서의 삶은 공허하고 희망이 없다고? 그럼 나는? 떠날 수 없는 우리는 뭐지? 남편 붙잡고 울 것까지야 없지만, 그 마음은 그럴수도 있겠다. 부러움과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은 모두 그들 부부의 선택이 “비현실적"이라는 말로 일축되는 것 같다.


아내는 마지막 날 아침이 되기 전까지, 그러니까 마침내 포기하기 전까지 되묻는다.


비현실적이라고? 그럼 도대체 뭐가 현실적인 건데? 


그리고 그날 아침,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파리에 가겠다는 건 너무 비현실적이었던 거였지?"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아내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생각을 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정서적으로 불안해보이기도 하고. 확실히 그런 면이 있다. 그녀의 갑작스런 선택, 알수 없는 공허함, 우울감. 이 모든 것은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인다. 현실적이라는 것이 돈을 벌고, 일상을 영위해나가고, 내가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존재라는 걸 수용하는 것이라면. 하지만 또 한편 생각해본다. 스스로가 이건 아니라고 느끼는 것, 그것은 현실이 아닌 꿈인 것일까. 매일 매일 생활을 위해 살면서 이건 내가 아니야, 진짜 삶이 아니야, 라고 느끼는 것, 그 감정 또한 부인할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러니 아내를 대책없는 이상주의자에 감정적인 사람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지금 그곳에, 그 집에, 결혼생활 속에 없었고, 그것은 그녀 자신만이 아는 진실이었다.


그렇다고 남편과 이웃이 마냥 이상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는 아주 좋은 남편이라 할수는 없을지 몰라도 또 아주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그저 평범한 가장이다. 가족 모두를 데리고 아무 것도 없는 파리로 떠나는 것과 승진, 아마 길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봐도 99%는 승진과 높은 보수를 택할 것이었다. 그게 그에게는 현실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남편이 너무한가 싶었다가, 중반에는 아내가 너무 감정적이고 혼란스러운 것 같다 싶었다가,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잘 모르겠다.


나는 두 사람 모두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다.


현실적, 이란 무엇일까?


'realistic'의 의미를 다시 검색해봤다.


1          현실적인, 현실을 직시하는
2          현실성 있는, 현실에 맞는, 실현 가능한 (=feasible, viable)
3          사실적인, 실제 그대로의 (↔unrealistic)      


평소에는 별 생각없이

‘현실적인 사람'이라는 말을 써왔는데,

저 사전의 뜻을 보니 나는 2번의 의미를 담아 그 말을 썼구나 싶다. 3번의 의미로 바꾼다면 그때 현실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보는 아침이다.


사물과 사람,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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