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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볕 냄새 Sep 06. 2024

미안하다면 다야? 아니.

이언 맥큐언 <속죄>

우리는 모두 살면서 크고 작은 잘못을 저지른다.

고의로 한 것은 물론이고, 실수나 잘 해보려고 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일을 그르치기도 한다.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는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죄값을 치르면 된다고 하지만 내 잘못으로 인한 피해가 크면 클수록 그런 용기를 내기가 쉽지 않다. 때론 용기를 내어 사과를 한다고 해도 상대가 이를 받아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미안하다면 다야? 다냐고!!!


이 말이 차갑게 들리겠지만, 정말 큰 상처나 피해를 입혔다면 이런 말을 들을 각오를 할수밖에.

손해 배상이라도 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어떤 것은 영원히 다시 돌이킬 수 없으니까.


내가 저지른 일이 감히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인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망설일 수도 있고, 과거에 잘못을 고백했을 때 용서받아본 경험이 없다면 미안한 진심과 애써 낸 용기가 거절당할까 두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잘못이 클수록 상대방의 용서 여부와 관계없이 사과하고 책임을 지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용서는 감히 구할 엄두도 못내겠지만 자기 행위로 인한 피해나 고통은 어떻게든 줄여보려고 노력하고 평생 속죄하며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결론은,

미안하다고 했다고 해서 전부냐? 아니다.

하지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니까 적어도 그 전부의 시작이 된다.


스스로를 조금 덜 미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의 시작.



이언 맥큐언의 소설 <속죄>에는 잘못된 증언으로 타인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소녀 브리오니가 있다. 영화 <어톤먼트>를 보고 모두가 “이 나쁜 X”라며 욕했던 바로 그 브리오니는 우리나라 형법에 따르면 형사미성년자로 아마 자신이 한 행동에 법적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브리오니의 잘못된 증언으로 인해 한 사람, 아니 두 사람, 세 사람의 인생을 무너뜨렸다. 전도 유망한 의대생이었던 로비, 그런 로비를 사랑한 언니 세실리아, 세실리아의 집에서 평생 가정부로 일했던 로비의 엄마까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결과로 브리오니 자신의 삶도 되돌릴수 없게 되어버렸다. 어린 브리오니는 무지했고, 그런 자신의 무지를 모른 채 오만했다. 그 오만함으로 큰 죄를 저질렀지만, 그것을 깨달은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려 애쓰며 살아간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브리오니가 그렇게 욕을 먹어야 할만큼 나쁜 사람인지 의문이 들었다. (키이라 나이틀리와 제임스 맥어보이의 팬이었던 나도 영화를 보면서는 브리오니를 미워했다.^^; 또 영화는 소설만큼 주인공의 내밀한 심리가 잘 드러나지 않아서 브리오니가 얼마나 후회하고 괴로워하는지도 불분명했다.) 물론 브리오니는 나쁜, 잘못된 행동을 했다. 거짓 증언으로 여러 사람의 인생을 망쳤으니까. 브리오니가 나쁜 마음을 먹고 그랬느냐, 즉 동기가 나빴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로비의 편지를 읽고 그가 언니에게 위협적인 존재라고 생각했고, 마침 일어난 성폭행 사건의 범인이 로비라고 생각했다. 어린 소녀였던 브리오니는 남녀 관계에 대해 무지했고,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을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확신까지 했다. 그래서 의도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녀는 분명 잘못을 했고 비난받아야 했다.


하지만

브리오니가 속죄를 하려 노력했다는 것,

오랫동안 자신을 미워했고 괴로워했다는 것, 그것만은 인정해주고 싶다. 물론 자신의 상상 속에서였지만 그녀는 언니와 로비를 찾아가 사과를 했다. 용서할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차가운 언니와 자신의 목을 비틀어 죽여버리고 싶다는 말하는 로비를 상상했다. 그녀는 로비와 세실리아가 얼마나 분노하고 자신을 원망했을지,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상상 속 그들의 입을 빌려 스스로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용서받을 수 없고, 죽여버리고 싶은 존재. 바로 그게 브리오니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을 때, 어쩌면 공식적으로 처벌을 받는 것이 더 쉬운 길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죄값을 치렀다는 생각을 하게 될테니까. 그런 점에서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평생 안고 사는 것이 더 큰 벌일지도 모른다. 소년범죄가 증가하는 현실 속에서 촉법 소년의 연령을 낮춰야 하는게 아닐까, 우리나라는 소년범에 대해 너무 관대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던 나는 심재광 판사가 쓴 <소년을 위한 재판>을 읽으면서 마음이 조금 바뀌었다. 공식적인 처벌은 그저 벌로만 끝나고 잊혀질 뿐인 게 아닐까. 그 벌을 받는 것이 가해자에게 고통을 줄 수는 있겠지만,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브리오니는 작가가 되고픈 소녀였다.

브리오니가 그런 엄청난 죄를 지은 것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모든 것을 전지적으로 알고 판단하고 싶어하는 성격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브리오니가 전쟁 중에 출판사에 보낸 소설은 언니와 로비의 분수대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처음에 그녀는 둘 사이에 개입한 자신의 이야기를 쓰지 않았고, 출판사의 답장은 바로 그 점을 콕 찝었다.


그러니까 네 소설에는,

이 이야기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어.

작가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소설 속에서 빠져버린 그것은 그녀의 삶을 척추가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건 바로 브리오니가 자신의 삶에서 가장 후회한 것, 분수대의 두 연인을 오해한 데서 시작한 거짓 증언과 그것이 몰고온 파국이었다. 그것은 열 서너살 이후 브리오니의 삶을 전부 바꿔버린 사건이었으니까.


결국 브리오니가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고 잊어버리지 않는 것, 이미 죽어버린 언니와 로비를 대신하여 소설이라는 간접적인 방식으로라도 속죄를 하며 살아가는 것은 그녀가 자신의 삶을 빈 껍데기로 만들지 않기 위한 발버둥과도 같다.



자신을 벌하기 위해 간호병으로 참전한 브리오니가 부상병들을 치료하면서 깨달은 것은 바로 누구나 알고 있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인간은 물질적 존재라는 것,

쉽게 파괴되지만 쉽게 회복되지는 않는 존재라는 것.


미안하다고 해서 전부인가,

그렇지 않다.

내가 준 상처는 생각보다 쉽게 회복되지도,

용서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

잊지 않는 것

그게 브리오니가 삶의 척추를 바로 세우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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