셸리 리드, <흐르는 강물처럼>
고등학교 친구 중 한 명은 중국인과 결혼해 북경에 산다. 조금은 사치스럽고 화려한 삶을 살던 그녀는 현재의 남편을 만난 뒤 180도 딴 사람이 되었다. 대학 신입생 때부터 찐한 화장에 값비싼 가방을 메고 쨘! 하며 등장하던 그녀가, 화장기 없는 맨 얼굴에 머리는 고무줄로 묶고 운동화를 신은채 카페에 등장했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란 눈의 우리에게 그녀는 더 놀라운 러브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중국에서 운명처럼 만난 남자친구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들려준 후로도 오랫동안 두 사람은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롱디 커플로 지냈다. 몇년 동안 친구는 부모님의 온갖 반대를 이겨냈고, 투잡 아니 쓰리잡을 뛰며 돈을 모아 중국으로 보냈다. 그 화려하던 애가 옷도 화장품도 안사고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돈을 모은단 얘기에 어찌나 놀랬던지. (중국에서 집을 사기 위해 돈을 모으기도 했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심해서 그간 자신을 기르고 지원한 부모님께 돈으로라도 보답하고 떠나고 싶어서라고 했다.)
부모님의 반대가 극심해지자
어느 날 친구는 차라리 부모님이 결혼하라는 남자랑 결혼한 뒤 불행해진 자기 모습을 보여주고 이혼해버릴까, 생각도 했댄다. 그때 지금의 남편은 그렇게 이혼하고 온대도 자신을 기다리겠다고 했다며 울먹였다. 그 소릴 들은 난 뭔 소릴 하는 거야? 뭔 딴 남자랑 결혼했다 이혼하고 불행한 모습을 보여준단 거야? 차라리 야반도주를 해. 지금 반대해도 물리치고 결혼해서 잘 사는 거 보여주면 되는 거지, 부모님 보라고 내 인생을 망친다는 게 말이 돼??
(결국 그녀는 그 남자와 결혼했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큰 딸이 외국인이랑 결혼하면 죽어버리겠다고 하셨다던 아버지도 멀쩡히 잘 지내신다.)
사람은 언제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일까?
절망스러운 순간에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심지어 그 사람은 죽고 없는데도)
사랑을 좇아 야반도주를 한 소녀의 이야기ㅡ
셸리 리드의 소설 <흐르는 강물처럼>을 읽으면서 아주 단순한 그 대답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사랑할 수 있게 되면 그때 나는 이전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또 단 한 사람이라도, 누군가로부터 진실한 사랑을 받게 되면 먼 훗날이라 해도 그 사랑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우리 모두 그런 순간, 그런 사람의 기억을 하나쯤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며 나도 그런 순간을 떠올린다. 자율학습을 하고 있으면 운동장을 가로질러 도시락 가방을 가져오던 아빠의 오토바이, 친구들 모두가 너희 아빠 왔다! 라고 할 때, 그때는 그 기억이 이렇게 오래도록 남을 줄은 몰랐다(물론 엄마는 그 도시락은 엄마가 쌌고, 아빠는 배달만 한 거라고 늘 주장하시지만^^), 감자를 캐던 날 맨발로 밭에 뛰어다니다가 삼지창 쇠고랑에 발을 찔렸을 때 독을 빨아내야 한다며 입으로 내 발가락을 빨던 엄마도, 늘 카라멜콘과 땅콩을 두 봉지씩 사들고 자취방에서 우릴 기다리던 팔순의 할머니, 늦은 밤에도 재래식 화장실 앞에서 무서워하는 손녀를 기다려주던 할아버지도.
설령 이 아름다운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고 해도, 그 사랑의 기억으로 남은 평생을 살 수도 있는 거였다. 빅토리아는 약하지만 윌의 여자는 강하다고 주문을 걸면서, 겁 많고 순종적인 소녀가 용감하고 씩씩한 여자가 되어.
빅토리아는 자칭 평범한 소녀다. 어머니와 오빠, 이모가 사고로 돌아가신 뒤 아버지, 이모부, 남동생과 함께 복숭아 농장을 일구고 살아가는 평범한 아이. 그런 그녀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장면은 내 상상 속에서 슬로우 모션으로 그려졌다. 조금 검은 피부를 한, 옷차림은 볼품 없지만 건강한 몸과 미소를 가진 낯선 남자가 길을 묻는다. 발목을 다친 소녀를 부드럽게 안아올린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일, 마치 나를 부르는 듯한 석탄 수송 열차의 기적 소리, 사거리에서 마주쳐 길을 묻는 이방인, 흙길에 떨어진 갈색 술병처럼 별일 아닌 사건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는다.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어도 우리 존재는 탐스럽게 잘 익은 복숭아를 조심스럽게 수확하듯 신중하게 형성되는 게 아니다. 끝없이 발버둥치다가 그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거둘 뿐이다.(38쪽)
나는 운명론자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운명이란 게 정말 있는 걸까, 싶다. 우리가 어떤 우연한 순간을 운명으로 만듦으로써 스스로 운명론자가 되는 거겠지만.
그의 이름은 윌.
둘은 사랑에 빠졌지만,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은 인디언 혈통의 이방인인 윌을 경계했고, 어느날 그는 피투성이로 발견된다. 빅토리아와 윌이 직접 만나서 애정을 나누고 이야기를 주고받은 시간은 매우 짧다. 하지만 그 순간으로 빅토리아는 생명을 갖게 되고, 그는 빅토리아의 유일한, 평생의 사랑이 된다. 죽었지만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는, 살아있는 그 무엇보다 힘이 센.
빅토리아는 윌을 만난 뒤 달라졌다.
자신을 반기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듯 굵고 단단한 두 팔로 자신을 안아주던 남자, 흐르는 강물처럼 살거라던 남자, 후회도 걱정도 없이 현재를 살던 그를 만난 뒤 그녀의 세상은 크고 넓어졌다. 산속 동굴에서 혼자 아이를 낳을 수 있었고, 동네 사람 모두 미친 여자라 부르던 한 노인의 외로움과 삶의 고단함을 이해하게 되었고, 위협적이라 두렵기만 했던 남동생에게 맞서며 그 이면의 나약함도 볼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일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마주하며 살아왔다고, 옳은 일을 하려고 애쓰며 살아왔다고 했다. 친구의 말대로라면 그때 그때 해야 할 일을 하며 살아왔다. 가족과 고향을 떠나 홀로 남은 그녀가 모든 것을 마주하며 살수 있었던 것, 도망치지 않고 남탓하지 않으며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윌의 눈과 마주친 그 순간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랑은 상대를 이해하는 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 자신을 이해하고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길이니까. 그런 나를 수용하고 달라지는 선택도 그런 마음에서 비롯되니까.
어제 그의 눈동자에서 내가 본 것은 생각지도 못한 부류의 남자 한 명만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새로운 내 모습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의 나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100쪽)
그래서 결론은
사랑은 힘이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