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비평 TV언박싱 32. <소년심판>
‘촉법소년’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10세 이상 만 14세 미만의 형사미성년자로서 형벌을 받을 범법행위를 저지른 사람. 촉법소년은 형사책임 능력이 없기 때문에 형벌이 아닌 보호처분을 받게 된다.' 청소년은 아직 판단이 미성숙하고 행동이 충동적이라는 점을 감안해 만들어진 일종의 보호 체계라 볼 수 있다. 문제는 아이들의 죄목이 어른의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살인, 절도, 강간, 성매매 알선… 대중의 공분을 산 사건들이 일파만파 퍼져나가면서 죗값과 청소년 보호를 저울질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사람들은 혼란스러웠다. “아직 어린 애들인데…”와 “뭐가 어려, 알 거 다 아는 나이인데!”가 공기 중에 마구 뒤섞여 있었다. 우리에겐 입장 정리가 필요했다.
<소년심판>의 등장은 타이밍이 좋았다. 촉법소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저마다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고유의 멍석을 편하게 깔아줬기 때문이다. 특히 소년범 당사자를 중심으로 피해자, 부모, 판사, 경찰, 보호관찰관, 청소년 회복센터장, 사업주, 일반 대중 등이 소년범에 대한 각기 다른 입장을 전할 기회를 줌으로써 시청자는 이 흐름에 청중으로 자연스레 참여하게 된다. 누구의 의견을 더 강조하는 법 없이 일정한 거리 유지를 지킨 덕에 균형 잡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게다가 죄를 저지른 청소년을 대하는 방식이 전례 없이 눈에 띈다. 5화에서 푸름청소년회복센터에서 뛰쳐나온 7명의 아이들이 집단폭행, 성 착취와 협박, 성매매 알선 등으로 처벌받을 때, 심은석 판사는 단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가정이 그리고 환경이 소년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나 다양한 선택지 중 범죄를 택한 건 결국 소년입니다. 환경이 나쁘다고 모두가 범죄를 저지르진 않죠.”
동시에 드라마는 센터장의 목소리를 빌려 덧붙인다. “집에서 상처받으면 아이들은 자신을 학대해요. 평소에는 안 했을 범죄를 저지른다거나 나쁜 아이들과 어울리는 식으로. 본인들도 알아요. 하면 안 된다는 거. 알면서도 하는 거죠. 나를 학대하는 게 가정에도 상처가 되길 바라면서. 나 좀 봐 달라고. 나 힘들다고. 사실 대부분 비행의 시작점은 가정이거든요.”
그리고 이어지는 아이들의 역사. 가정폭력, 계부의 성폭행, 생계유지로 인한 부모의 보호력 부족, 학교 적응의 어려움까지. 이런 이유로 모든 죄를 면피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외면하고 모르쇠할 수도 없는 무거운 이유가 아이들에게 떠안겨 있음을 현실적으로 짚어낸다. <소년심판>은 청소년을 오로지 환경에 의해 영향받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그리거나, 반대로 오로지 악랄한 의도만으로 행동하는 존재로 그리지 않는다. 그보다는 외부적 영향을 받지만 결국 선택은 자신이 한다는, 인류 보편적 태도로 접근함으로써 청소년을 어엿한 사회의 일원으로 대우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청소년은 인간이 된다.
주인공이 피해자 사진을 앞에 두고 재판에 임하는 것도, 소년범을 미화시키는 신파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장치라 할 수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철저히 분리함으로써, ‘범죄에 빠진 아이들도 결국 사회의 피해자다' 같은 말로 사건의 본질을 흐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하다. 심은석 판사는 왜 반복해서 소년범들에게 “감히"라는 표현을 썼을까?
“(시설에서 나온 지) 몇 시간도 안 됐는데 감히!”, “그 나이에 감히.”
‘감히'라는 말을 들으면, 특정한 선이 느껴진다. 지켜졌어야만 했는데 예기치 못하게 침범당한 선. 사실 청소년이라고 죄를 저지르지 못할 바는 없고, 또 이야기상에서 청소년들이 처한 배경이나 그들의 태도를 보면 범죄를 저지르는 게 뜬금없어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그는 믿기 어려운 광경을 봤다는 듯 분노에 휩싸여 ‘감히'라는 말을 반복한다. 심지어 심은석 판사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더 요상하다. 그는 소년범에게 몹시 엄격하고 그들의 갱생을 불신했던 사람 아닌가? 오히려 청소년이 잘못을 저지르는 비합리성을 이해하는 게 더 어울려 보인다.
‘감히'라는 말은 그 사람에게 본래 주어진 주제가 있음을 전제한다.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것. 주제넘지 않는 것. 그리고 그것을 어길 때, ‘감히, 네가!’ 라는 격노가 분출되고 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심은석 판사의 ‘감히'는 아이들에게 있는, 있어야만 하는 사회적 탄성을 바탕에 둔 말이다. 탄성이란 무엇인가?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성질'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하나 더 생긴다. 아이들이 원래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7명의 아이들이 우르르 처벌받던 5화에서, 바로 이송되는 아이들 뒤통수로 외쳐지는 희미한 목소리 하나가 있다. “혜림아! 걱정하지 마!” 아마도 소년범의 부모인 듯하다. 나는 이 외마디야말로 ‘소년(少年)’의 정체성을 확실히 정의해준단 걸 알았다. 죄를 지어 벌을 받으러 가는 길조차도 자신의 걱정을 걱정받는. 사실은 그런 염려 속에 있어야 하는 존재. 감히 죄를 저지를 게 아니라, 감히 법정에 설 게 아니라, 이들이 본래 있어야 할 곳에 머무르는 존재. 무엇이 ‘감히'이고, ‘감히'가 아닌 것은 무엇인가? <소년심판>은 아이들의 원위치와 주제를 더 생각하라 재촉한다.
<소년심판>은 ‘나는 소년범을 혐오합니다’로 시작하고 끝이 난다. 이 말은 심은석 판사는 물론, 소년범을 향한 일반 대중의 태도일 것이다. 다만 우여곡절을 거친 마지막 화에서는 조금 더 긴 부연 설명과 조건절이 붙는다.
“저는 소년범을 혐오합니다. 싫어하고 미워할지언정 소년을 위해서라면 최선을 다할 겁니다. 싫어하고 미워할지언정 처분은 냉정함을 유지할 겁니다. 싫어하고 미워할지언정 소년에게 어떠한 색안경도 끼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처음 마음가짐, 그대로. 또는 그 전과는 다르게. 저는 소년범을 혐오합니다.”
이 말은 꽤 날카로운 다짐이자 경고다. 범죄를 저지른 소년의 잘못이 사회의 책임이냐, 소년범 당사자의 책임이냐, 가정의 책임이냐. 이야기는 내내 이 질문을 던졌지만, 그걸 뛰어넘어 책임소재와 별개로 어른들에겐 사회구성원으로서 해야 할 어른의 일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당신이 소년범을 싫어하기만 하고 혐오하기만 한다고 세상이 정말 변하나요? 당신도 뭘 좀 해야지,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