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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연 Jan 25. 2019

그 못된 여자애가 성장하는 방식

대중문화비평 TV언박싱 - 시에라 연애 대작전

<이자연의 TV언박싱>에서는 대중문화비평을 다룹니다. 아주 주관적이고, 가끔 사심을 듬뿍 담아 인상적이었던 여성 인물의 서사를 풀어내고 의견을 공유합니다.


*해당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에라 연애 대작전ㅣNETFLIX

줄거리ㅣ학교에서 찌질이로 통하는 주인공 시에라는 학교 퀸카인 베로니카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식당에서 제이미가 베로니카에게 전화 번호를 묻게 되고, 베로니카는 장난삼아 시에라의 번호를 넘기고 만다. 그런데 제이미와 시에라, 둘의 대화가 맞아도 너무 잘 맞는다. 어느덧 제이미에게 사랑에 빠지게 된 시에라. 용기를 불끈 내어 베로니카에게 다가가 하나의 제안을 건넨다. “지금 네게 필요한 걸 알려줄 테니, 내가 너인 척 할 수 있도록 해줘.” 시에라와 베로니카, 그리고 제이미는 이 거짓말을 어떻게 풀어나갈까?


그 여자애가 성장하는 방식


주인공 말고, 저 못된 여자애

예쁘장한 미모로 주목 받는 삶이 익숙한 학교 퀸카 베로니카. 그리고 그녀와는 정 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시에라. 주인공 시에라는 조금 큰 덩치와 꾸미지 않은 외모로 또래들로부터 놀림을 자주 받곤 한다. <시에라 연애 대작전>의 원제가 <Sierra Burgess Is a Loser시에라는 찐따>인 것만으로도 시에라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을 어떻게 그려냈는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시에라 연애 대작전ㅣNETFLIX

영화는 시에라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시작한다. 뚱뚱하고 예쁘지 않은 여자애가 우연히 같은 학교의 남자를 좋아하게 되고, 성공적으로 사랑을 이루게 되었다는 굵직한 클리셰는 사실 서사적으로 크게 흥미롭지는 않다. 그러니 나는 시에라가 아니라, 베로니카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 못돼먹은 여자애는 어떻게 성장하는지,에 관하여.


베로니카는 시에라가 늘 거슬린다. 베로니카 눈에 비치는 시에라는 그저 못생긴 얼굴에 뚱뚱한 몸을 지닌 찐따, 찌질이니까. 시에라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제 무리 친구들에게 조그맣게 이런 말을 흘리기도 한다. “존재감 없는 삶은 어떨까?” 이건 그녀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잘생긴 외모에 잘 나가는 무리와, 그렇지 않은 무리.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만든 이분법적 계층 구조에서 최상위권을 독식하고 있다. 제이미가 식당에서 베로니카에게 전화 번호를 물어봤을 때, 마음대로 시에라의 번호를 넘긴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원래 저렇게 찌질이들끼리 노는 거야, 하면서.


그렇게 제이미는 베로니카라고 생각하며 시에라와 문자를 주고 받게 되었다. 시에라의 반응은 어땠느냐고? 단박에 오해를 알아 차렸으면서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그녀의 말에 의하면 ‘밤새 내내’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은 좋은 대담자였다. 서로의 얼굴을 아는 줄 알면서, 모르는 줄 알면서 불투명한 익명이 조금씩 연장돼 갔다.


ⓒ시에라 연애 대작전ㅣNETFLIX


그 여자애에 관한 말들

“얼굴만 예쁠 줄 알고 걱정했는데, 진짜 똑똑하고 재미있더라고."

잠시 퀴즈 하나, 누구의 말일까? 새벽 내내 시에라와 대화를 나눈 제이미가 체육 시간 친구들에게 건넨 말이다. 이 순수하고 무해한 의도의 칭찬부터 나는 자꾸만 베로니카를 생각하게 됐다. 혹시 감독이나 작가가 이 대사를 일부로 의도한 것이라면, 실질적 고증이 기반된 완전한 하이퍼리얼리즘 하이틴 로맨틱 코메디라고 말하고 싶다.


얼굴이 예쁘고 유명한 여자애는 머리가 텅텅 비었을 거라는 지극히 지루한 사상을 비롯해서, 무례한 평가인 줄도 모르고 칭찬이라고만 여기는 제이미의 무심한 태도가 몹시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너무 일상적인 나머지 주변에 널브러진 돌멩이처럼 인식하지 못한 채 흘러가버리는, 무수한 남자애들의 말. 제이미가 베로니카를 가리키며 ‘예외적인 부분’이라고 짚어낸 내용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우습다.


돌이켜 보면, 제이미는 베로니카가 지어낸 이분법적 계층보다 훨씬 복잡한 층위를 두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얼굴은 예쁜데 ‘나랑 말이 통하는’ 지식을 가진 여자와, '얼굴만 예쁜' 여자. 얼굴은 못생겼는데 나랑 친구할 수 있고 블라블라블라. 엄청 구체적일 거다. 그리고 그 계층 평가에 자신은 철저히 배제돼 있다. 그러니까 결국 제이미도 베로니카와 마찬가지로 계층을 나누어 타인을 평가하면서, 악의 없이 다정하고 평온한 태도에 욕은 솔직한 베로니카만 먹는 거다. 오오, 얼굴만 보는 퍼킹 비취 같으니! 하지만 나는 괜찮아, 칭찬이니까!


평범한 제이미들이 만들어낸 평가 항목에 베로니카와 시에라는 어떤 영향을 받느냐고? 그들은 버릇처럼 자기를 탓한다. 대학교 1학년 남자친구인 스펜스가 베로니카에게 이별을 고했을 때, 베로니카 첫 마디는 이랬다. “대학친구들에 비해 내가 멍청한 가봐.” 학교 계층사회에서 최상위를 독식하고 있다고 표현했던 베로니카 조차 끊임없이 자기를 탓한다. 보편적으로 퍼뜨려진 여성들의 자가 검열을 그녀도 피할 순 없다. 시에라? 시에라는 자기가 제이미의 텍스팅 상대라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 언어 장애인인 척도 했는걸?

 

ⓒ시에라 연애 대작전ㅣNETFLIX


베로니카와 시에라, 시에라와 베로니카

계약을 맺었다. 베로니카가 스스로 느낀 지적 부족함에 시에라가 특별 과외를 해주기로 했다. 대신 시에라가 베로니카인 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하고. 이로써 둘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었고, 생각 보다 많은 개인적인 것들을 나누었다. 남 모르는 가족사도 우연히 목격했고, 위로하고, 달랬다. 경계는 허물어졌고, 퀸카나 찌질이 같은 꼬리표는 무의미해졌다. 베로니카가 스펜스와의 문제가 다시 불거져, 저 복도 끝에서 시에라에게 달려왔을 때, 그리고 울면서 그녀를 끌어안았을 때, 나는 무언가를 느꼈다. 무해한 관계의 안락함. 서로를 평가 하지 않는 관계에서 오는 그 안락함.


ⓒ시에라 연애 대작전ㅣNETFLIX


나는 여자애들 특유의 나른하고 의미 없는 말들이 좋다. 침대에 누워서, 소파에 널브러진 채, 건네고 건네 받는 말들. 그 별 뜻 없는 말들 사이에는 아주 짙고 깊은 정서적 교감이 있다. 그래서 이 두 여자애들이 발목을 부딪히며 공중으로 휘발해 버리는 대화를 나누었을 때, 나는 몽중에 있는 느낌을 받았다. 베로니카와 시에라, 시에라와 베로니카. 멀지 않은 과거에 비슷한 순간이 자꾸 떠올랐다.


베로니카가 그토록 외모에 집착했던 이유는, 사실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남자에게 버림 받은 뒤로, 여자는 무조건 날씬하고 아름다워야만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기 때문이다. 너희 나이에 정크푸드 먹는 거 아니다, 평생 뺄 수 없는 엉덩이 살이 올라 와서 소처럼 커진다, 하는 말을 하면서 말이다. 엄마와의 경직된 관계 속에서 속절없이 지내던 베로니카는 감자칩을 한 움큼 사서 집으로 들어갔다. 쌍둥이 동생이 그걸 먹으면 어떻게 되겠냐며 펄쩍 뛰는 엄마에게 베로니카는 이렇게 말한다.


ⓒ시에라 연애 대작전ㅣNETFLIX


화장실에서 마주친 시에라를 프로도라고 부르며 조롱하고, 누군가의 삶을 ‘존재감 없는 삶’으로 치부하던 못돼먹은 여자애는 이제 자신 밖에서 벌어지는 평가와 검열로부터 반기를 들고 저항하기 시작했다. 베로니카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성장하고, 태도 전환을 하게 된 인물이기도 하다. 악의 없는 칭찬 속의 평가로 자라난 여자애들이 이제는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단 하나. 그녀를 평가할 수 있는 것은 누구인가. 그녀뿐이다.


ⓒ시에라 연애 대작전ㅣNETFL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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