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비평 TV언박싱 -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이자연의 TV언박싱>에서는 대중문화비평을 다룹니다. 아주 주관적이고, 가끔 사심을 듬뿍 담아 인상적이었던 여성 인물의 서사를 풀어내고 의견을 공유합니다.
*해당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줄거리ㅣ절대 권력을 지닌 영국의 여왕 '앤', 여왕의 오랜 친구이자 권력의 실세인 '사라 제닝스', 그리고 신분 상승을 호시탐탐 노리는 몰락한 귀족 출신 하녀 '에비게일 힐'. 프랑스와 한창 전쟁 중인 영국을 배경으로 궁 안팎으로 활개 치는 세 여자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끊임없이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그녀들을 보면서 아주 편안하고, 아주 낯선 광경을 느끼게 된다.
장동민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어떤 방송에서였다. 연애 상담을 다루던 프로그램에 나온 개그맨이 여성 모델을 향해 "설치고 떠들고 말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당신은) 내가 싫어하는 걸 다 갖췄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방송국은 그 장면을 여과 없이 송출했다. 떠드는 여자를 단죄하던 칠거지악이 21세기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누가 이 터무니없는 규범의 숙주가 되었나. 그 답은 쉽고 간단하다.
‘설치고 떠들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 가볍게 발화된 만큼, 먼 곳으로 쉽게 퍼져나갔고 이내 하나의 슬로건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실제로 “설치고 떠들고 생각하라(GO WILD, SPEAK LOUD, THINK HARD)”는 말이 어찌나 인기가 많았는지, 알라딘에서는 이 문구로 다이어리와 키링을 제작해서 사은품으로 증정하기도 했다. 그가 의도치 않은 쾌거라면 쾌거겠다. 여기서 문득 두 가지 의문이 따른다.
①말하고 생각하는 여자가 싫다는 말을 그가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으며, ②시청소비자의 반이 여성인 프로그램은 필터링 없이 이를 웃음 거리로 내보낼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애초에 도태되어도 일찍 도태됐어야 했던 것들이 어찌 여전히 살아남았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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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우리는 더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이하 더 페이버릿)>에서 나오는 세계는 낯설고도 익숙하다. 절대 권력을 가진 군주 ‘앤’은, 한창 프랑스와의 전쟁 중 몇 번의 승전이 더 필요하다는 여당과 이제 전쟁을 멈추고 화친을 맺어야 한다는 야당의 사이에서 퍽 곤혹스러워 한다. 그런 그녀에게 ‘사라’는 외롭고 숨가쁜 궁중생활의 빛이었다. 오랜 친구이자 연인이고, 조언자이자 부모같이 안락한 지지자이기도 했다. 여왕은 감정기복이 잦은 만큼, 사라를 찾았다.
사랑이었다. 아주 전형적인 클리셰처럼 들리겠지만, 그건 분명 사랑이었다. 지극히 보통의 것이어서 서로를 질투하고, 수호하고, 탐했다. 사라와 앤의 뜨거운 사랑을 두고, 야망 가득한 에비게일이 둘 사이의 커다란 파동을 일으킨다는 줄거리는, 거대한 치정의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데에 힘을 얻었다. 전쟁을 이야기할 때 여성이 피해자가 아닌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었나. 이 영화가 내게 낯설었던 이유를 그제야 알아차렸다. 초기 설정이 여성일 때, 우리는 그 안에서 무엇을 충족할 수 있을까. 그 안에 빠져나간 것들을 아주 천천히 세어나가려 한다.
FIRST, WOMEN AS A TOOL
도구로서의 여성
문득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떠오른다. 청명하고 아름다운 여름 풍경 뒤로, 찰나의 사랑이 한 편의 꿈처럼 느껴지는 영화였다. 서로의 존재 가치를 인식하기 시작한 올리버와 엘리오는 가 닿을 수 없는 감정에 도달하고 만다. 이 열병 같은 사랑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앓아 눕는 사람들도 종종 보였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순간, 내 머릿속에는 질문이 부유하기 시작했다. 분명 치명적이랬는데. 분명 아름답다고 했는데…
과정이 석연찮다. 올리버와 엘리오가 사랑을 깨닫는 과정에서 여성 인물이 활용되는 방식이 올드패션을 넘어서 지루했기 때문이다. 엘리오는 올리버를 자극하기 위해 또래 여자애에 관한 성적 농담을 공공연하게 흘리고, 개연성 없는 섹스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올리버와 마음이 닿은 이후로는 그녀를 모른 척 무시한다. 그들의 섹스는 무작정 없던 일이 됐다. 오히려 엘리오와 관계를 가졌던 여자아이가 그를 다독인다. 친구로 남아도 괜찮다는 말과 함께. 올리버는 어땠는지? 다른 여자들과 어울려 섹슈얼 포텐셜이 느껴지는 상황들을 한창 즐기다가 엘리오와의 관계 이후 그들을 피한다.
동성애를 깨닫기 위해 여성이 도구로 쓰이는 걸 처음 보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몇 번의 경험이 있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도 그렇다. 그들의 사랑을 더 간절하고 애틋하게 보여주는 장치로 인격을 배제한 채 여성을 장식품과 방해물로 이용했다. 반면 <더 페이버릿>은 자신의 애정을 확인하기 위해 남성 인물을 내세우지 않는다. 누군가를 빌리는 대신, 온전히 자신의 감정에 집중할 뿐이다. 에비게일이 자신의 권력 상승을 위하여 거짓된 사랑을 했을 때, 앤이 도구가 되었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앤은 모든 과정에 선택권이 있는 권력자였고, 몇 단계 수를 읽는 인물이기도 했다.
SECOND, WOMEN WITH INCAPACITY
무능력한 여자
<더 페이버릿>이 궁정을 배경으로 한 이상 묘한 기류와 눈치 싸움, 판의 흐름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앤과 사라, 에비게일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감정적으로 똑똑한(Emotionally-clever)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폭력적이지만 기존 남성 중심 영화에서 볼 수 있는 폭력과 다르고, 위협적이지만 이것 또한 기존 남성 중심 영화에서 보여주는 위협과 달랐다. 그들은 수에 능하고 감정을 부리는 데 익숙했다. 감정을 잘 읽었고, 그것을 흐트려 공격할 줄도 알았다.
처음에 사라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앤을 보면서, 사라와 앤의 애착관계가 여성 정치의 허점처럼 여겨질 가능성으로 보여 불안했다. 마침 옆에서 민생걱정을 하는 할리의 말들이 하필 합리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중 후반부에 헐벗은 몸으로 토마토를 던지며 노는 수상들 모습이 나오면서 그들이 전쟁을 직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궁중에서 어느 누구도 앤과 사라를 비난할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오히려 사라는 침착하고 똑 부러지게 상황을 헤쳐나갔다. 권력에 아첨하고 종들에게 패악을 부려 정보를 캐내던 할리와 달리, 사라는 모든 것을 정면 돌파했고, 잔머리도 좋아서 공식 석상에서 앤이 쓰러지는 연기를 하도록 조언까지 했다. 전쟁 브리핑을 직접 받고, 주문을 내리고, 반대 세력에 꼿꼿이 고개를 들고 조롱하는 모습은 짜릿하기까지 했다. 남자의 자존심을 건들면 어떡하냐는 걱정에 그녀의 대답은 이랬지. “여자는 가끔 장난치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LAST, ANYTHING ELSE
그 외
마지막으로 <더 페이버릿>에 “있었던 것”을 덧붙이고 싶다. <더 페이버릿>이 국내로 들어오면서 숨은 공신이 있었으니, 바로 김은주 번역가이다. 나는 잊으면 안 되는 것들을 다섯 번씩 직접 외치곤 하는데(주로 투두 리스트인데, 입으로 발화하면 절대 까먹지 않는다. 꿀팁입니다), 지금은 그녀의 이름을 외치고 싶다. 김은주 번역가. 김은주 번역가. 김은주 번역가. 김은주 번역가. 김은주 번역가. 복붙이 아니라 직접 썼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되새겨야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들리는 수많은 ‘Cunt’들 사이로, 자막에 창녀 소리를 한번도 보지 않을 수 있다니 놀라운 경험이었다. 번역가의 탓에 우리가 영화를 보며 간접적으로 겪었던 여성 혐오와 차별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반갑고 감사하다. 반말을 쓰는 남캐와 존대말을 쓰는 여캐. 창녀 프레임과 한국형 여성 혐오 표현들로 채워진 영화 자막에 사람들이 골멀리를 어찌나 썩었나.
그녀가 <더 페이버릿>에 없었다면 나올 수 없던 대사로 이 글을 마친다.
“어디 사내 새끼가 여자를 놀래켜?” – 에비게일
“내가 생각할 땐 말 좀 하지마.” – 에비게일
“나한테 귓싸대기 맞기 전에 요점만 말해요.” –사라
"남자는 항상 예뻐야지." - 할리
"우리는 같은 편 아니야?", "나는 내 편이야." -에비게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