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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연 Mar 21. 2019

사라진 여자, 봉미선

대중문화비평 TV언박싱 - 짱구는 못말려 <어른제국의 역습>

<이자연의 TV언박싱>에서는 대중문화비평을 다룹니다. 아주 주관적이고, 가끔 사심을 듬뿍 담아 인상적이었던 여성 인물의 서사를 풀어내고 의견을 공유합니다.


*해당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라진 여자


나는 종종 작품 안의 빈자리를 눈 여겨 보곤 한다. 충분하고 모자란 것 없어 보여도, 어쩐지 원래 있어야 할 것이 빠진 느낌이 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짱구는 못말려, 어른 제국의 역습>은 짱구 극장판 시리즈 중에서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과 호평을 받은 작품 중 하나다. 이야기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이렇다. 90년대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가스 냄새를 맡은 어른들은 어른이 되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세상을 침범하고 장악해서는, 오래 전의 호시절로 돌아가려고 한 것이다. 팔다리가 길쭉하고 키 큰 어른들이 장난감을 욕심 내고 떼쓰는 게 어색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 사랑하는 가족들과 미래를 꿈꾸는 짱구와 친구들이 있다. 이들은 아이가 되려는 어른들에게 과거에 정체하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설득한다.


짱구는 못말려 어른제국의 역습ㅣ신에이동화

애니메이션 극장판 대부분이 해피 엔딩을 숙명으로 두고있는 만큼, 힘들고 거친 사투 끝에 짱구 가족은 그들의 현재를 되찾는다. 마냥 아름다워 보이는 과거를 완료형으로 받아들이고, ‘미래 있음’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를 되새기자는 내용의 메시지가 느껴진다. 하지만 감동과 재미가 적당한 비율로 섞여있는 이 에피소드에서 나는 빈 자리를 보았다. 봉미선씨에 대한 이야기다.


봉미선 없는 봉미선 팀

짱구의 엄마, 미선 씨는 짱구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한다. 전업 주부로 일하는 많은 이들이 그렇듯, 미선 씨도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회사 생활로 늘 바쁜 형만 또한 짱구와 풍족한 시간을 보내려 애쓰지만, 현실적으로 미선의 시간적 분량을 따라오긴 어렵다.


<짱구는 못말려 어른 제국의 역습>이 사랑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생애를 그렸기 때문이다. 여러 곳에서 많이 회자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90년대 가스를 맡고 아이가 되어 자기를 못 알아보는 아빠를 깨우기 위해서 짱구는 아빠의 신발 냄새를 맡게 한다. (사람들을 조작하는 것도, 원래대로 돌리는 것도 냄새다.)


그리고 형만은 자신이 짱구 나이였을 적부터, 지금까지의 일대기를 주마등처럼 마주하게 된다. 아빠의 큰 뒷모습이 점점 작아지고, 시골에서 벗어난 도시 생활은 마음 같지 않고, 미선과 애틋한 사랑에 빠지고, 짱구가 태어나고, 새 집을 장만하게 되는 인생의 큰 터럭을 들여다 보는 것. 그리고 그는 다시 어른의 형만으로 돌아와 깨어난다.


ⓒ짱구는 못말려 어른제국의 역습ㅣ신에이동화

그리고 이제 봉미선의 차례가… 음, 오긴 왔지만, 영 이상하다. 장면이 전환되어 미선이 형만의 구두 냄새를 맡고 깨어나는데 그 뿐이다. 애매하다. <짱구는 못말려> 시리즈 내에서 짱구와 더 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엄마 미선인데, 극장판에서 역사를 들여다 보는 인물은 오로지 아빠 형만 뿐이라니. 심지어 미선은 자기만의 냄새도 아닌, 형만의 냄새로 깨어난다. 이 빈자리의 실체는 이렇다. 미선의 서사가 완전히 배제되었고 삭제된 것이다.


돌아와요, 봉미선 씨

별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미선의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이 자리에는 아빠 형만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애매하고 오묘한’ 감정이 자꾸만 내 마음속에 떠돌아 다닌다. 우리 주변에서 미선처럼 여성의 서사가 다음으로 미루어지고, 배제되고, 지워진 일이 결코 낯설지가 않기 때문이다. 순수히 기분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짱구는 못말려> 에피소드 중, 가까운 지방으로 여행을 갔던 형만이 휴게소에서 회사 직원들에게 나눠 줄 선물을 고른 적이 있다. 그리고 어떤 게 적합할지 몰라 미선에게 자문을 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전직 커리어 우먼, 미선 씨! 좋은 선물을 추천해봐!” 아뿔싸, 미선은 결혼을 하고 짱구를 낳기 전 커리어 우먼이었던 모양이다.


다시 한번 더 돌이켜 보자. 미선은 결혼 하기 전 어떤 유형의 여성이었을까? 알 수 없다. 그녀가 일했던 회사는 어떤 회사였을까? 알 수 없다. 그녀는 어떤 직무를 맡았고, 왜 일을 그만두게 되었을까? 알 수 없다. 짱구를 낳던 날 그녀는 어떤 마음으로 짱구를 맞이했을까? 역시 알 수 없다. 짱구가 우리와 함께 한 지 10년은 훌쩍 넘었는데 우리가 그녀에게 답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없다. 개인의 역사를 들여다 보려고 했다면, 누구에게 더 기회를 주어야 했을까? 신형만 계장?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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