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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빗ORBIT May 15. 2020

초승


 밤의 발바닥이나 핥으면서 살고 있다. 뾰족한 초승. 노트북을 펴려면 앉아야 하는데 앉기도 싫다. 그냥 침대에서 풍화와 침식, 퇴적까지 맞이하고 싶다. 아침은 사양할게. 몹시도 혼탁한 햇빛. 유백색의 시작이 벌써 두렵다. 누군가 태양을 훔쳐가 버린다면 계속 밤에 머물러 있을 텐데. 좋아하는 시인의 산문을 읽는다. 사실 산문을 읽어서 그의 시 마저 좋아졌다. 맥락도 서사도 없이 잘게 부서져 날카로운 문장을 한 입에 털어 넣는다. 글의 파편이 입가에 묻었다. 찢어진 입은 조금 더 커질 것이다. 사금파리 맛 우울. 혈액 속에 퍼지는 석영의 잔재들. 문득 유리공예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벌겋게 달아오른 용암 빛 유리를 힘껏 불어야지. 공황도 천식도 초승처럼 금세 사라질 거다. 내가 만든 잔에 와인을 넘칠 만큼 따르고 벌컥벌컥 마실 테다. 교양의 세계에서 추방당하고 싶다. 무법을 향유하고 일탈에 관대해서 나에게서 비롯된 모든 연민에 적선해야지. 새것의 정거장에 날아온 비둘기를 바라본다. 왜 겁내지 않는 거야. 나의 말은 힘이 없어서 자주 타인과 겹친다. 내 말 좀 씹지 마세요. 화나면 굉장히, 굉장히 무서운 사람인데. 겁 많은 조류의 허풍처럼 가슴을 부풀린다. 무구한 비둘기의 병들지 않은 깃털을 뽑는다. 파란 잉크를 묻혀서 편지를 써야지.


디어 마담. 당신의 뾰족한 등뼈를 기억합니다. 웨딩드레스는 무척이나 잘 어울렸어요. 열아홉과 스물셋. 그즈음의 일화들을 기억합니다. 당신 아버지도, 도망간 어머니도 모두 화가였다는 이야기. 그래서 내게 빌려준 붓들은 어쩐지 당신 양친의 유품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고모 손에 길러졌지만 당신은 고모를 엄마라고 불렀지요. 먼저 간 동생의 자식을 제 자식처럼 기른다는 건 어떤 걸까요. 꽤나 유복했다던 가세가 당신이 태어나고서부터 기울었다며 스스로를 불행의 씨앗처럼 여기는 당신을 나는 어떻게 위로해 줬던가요.


 수취인 불명의 편지에 살이 내렸다. 이토록 앙상한 편지를 당신에게 건넬 수는 없다. 어리고 그래서 지금보다는 조금 덜 비열했던 나를 기억이나 할는지. 초승달처럼 마르고 버석한 너의 몸. 끌어안을 때마다 부서질까 봐 걱정스러웠다. 온몸의 수분이란 수분은 눈동자에만 응축된 것인지 그 눈만은 항상 달에 젖은 호수처럼 척척했더랬다. 나는 너를 기억하려면 거짓말을 많이 해야 해. 소중했는데 소중히 대하지 못했다. 초승은 낮게 뜨고 낮게 진다. 그믐이 올 때까지 너를 서러워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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